오락 영화, 팝아트의 경지에 오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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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08면

스피드 레이서(Speed Racer) 감독 워쇼스키 형제 주연 에밀 허시·크리스티나 리치·비 상영시간 129분 개봉 5월 8일 제작연도 2008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들며 워쇼스키 형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며 그들이 했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광인 워쇼스키 형제가 상상력의 모태로 선택한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요시다 다쓰오의 만화를 1967년 52부작 시리즈로 만든 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다. 국내에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마하 고고고’는 미국에서 ‘스피드 레이서’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수많은 어린이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워쇼스키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40년이 지난 고전을 혁명의 원료로 선택했다. 형제 감독의 야망은 엄청난 제작비와 진일보한 기술력의 지원을 받아 현실로 이뤄졌다. 레이싱에 관해 무엇을 상상하든 ‘스피드 레이서’는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30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할리우드 최고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자들을 총동원한 워쇼스키 형제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게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를 다시 팝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때론 아동용 모험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진부한 가족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라는 매체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사전적 의미를 개정, 증보시키는 작품이다.

‘스피드 레이서’의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129분의 러닝타임을 압축하는 데는 몇 줄이면 충분하다. 주인공 소년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은 스피드(에밀 허시)다. 재능 있는 레이서였던 형은 경기 도중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레이싱카 제작자인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한다.

형의 뒤를 이어 레이서가 된 스피드는 단박에 레이싱계의 총아로 떠오르고 대기업 로열튼 회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만 고민 끝에 거절한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레이싱 경기를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로열튼은 스피드와 그의 가족을 위협하고, 때마침 스피드에게 로열튼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긴다.

`토고칸 모터스`의 태조(비)가 자기와 함께 팀을 이뤄 ‘카사 크리스토’ 경기에서 우승하면 로열튼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야심만만한 태조, 정체불명의 레이서 X와 팀을 이룬 스피드는 로열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경주에 뛰어든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이야기는 레이싱에 관한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애에 기반한 레이싱 선수의 활약상은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매트릭스’와 달리 몇 가지 작은 반전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가 가능하고 누구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현란한 편집 속도와 달리 이야기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인물들의 특징과 대결 구도는 2차원 만화처럼 평면적이다.

주인공은 한없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악당은 한없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그나마 태조와 레이서 X가 입체성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속편을 위한 배려 때문인지 자세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이야기 전개와 거의 상관이 없는 스피드의 동생 스트라이플과 원숭이 침침의 과도한 등장은 가족 관객을 위한 무공해 웃음을 주는 반면 영화의 러닝타임을 늘리고 이야기의 속도감을 떨어뜨린다.

이 모든 것은 채도 100% 총천연색 팝 아트 디자인과 쿵후와 카를 결합한 ‘카푸(Car-Fu)’에 가리기 때문이다. 현란한 색감의 화면과 게임의 상상력을 능가하는 CG 레이싱 액션은 사실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이싱 자동차들이 물리법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SF의 법칙에 의존해 청룽(成龍)과 리롄제(李連杰)처럼 결투를 벌일 때 관객은 압도될 수밖에 없다. 과감한 비현실적 디자인과 정교한 컴퓨터그래픽 연출은 영화를 값비싼 ‘오락용 첨단과학 팝아트 작품’으로 변화시킨다.

‘스피드 레이서’가 걸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영화사에 중요한 영화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영화에 대한 패러다임은 이미 오래전에 바뀌었고 타 장르와의 경계는 ‘스피드 레이서’ 같은 영화들로 인해 더욱 희미해지고 있다.

동서양 문화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영화 속 토고칸 가족은 한국·중국·일본 배우가 모여 만든 범아시아적 성격을 띠고, 영화는 서양의 자동차 문화와 일본 애니메이션과 중국 쿵후 영화를 한데 아우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비바 라스베이거스’와 숀 코너리의 ‘007 골드핑거’에서 영향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미국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탁구처럼 주고받는 문화의 순환적 상호 교류성을 대변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현대 영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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