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그림으로 … 조각으로 … 가는 선들의 향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정광호의 조각 ‘The Leaf 71155’(155×155㎝·下)는 김홍주의 세필화 ‘무제’(117×117㎝·上)를 닮아 벽에 붙은 채 잎맥처럼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선들의 향연이다. 솜털 박듯 세필로 가늘게 그은 선들이 모여 면을 이루고, 그 면이 한 장의 그림을 만든다. 제법 민주적이다. 또한 가는 구리선들이 모여 하나의 입체를 만드니 무게 잡지 않고 공간과 어우러진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선 그림, 선 조각이 만났다. 김홍주·정광호 2인전 ‘Natura’다

#선으로 그리다.

서양화가 김홍주(63·목원대 교수). 1980년대부터 줄곧 캔버스에 세필로 선을 긋고 있다. 아크릴 물감을 묻힌 가는 붓이 천을 스치는 느낌이 좋다는 그다. 그 우직한 붓이 수천 번 수만 번 지나간 자리엔 꽃이 나오고, 잎맥이 생기고, 누군가의 희미한 얼굴이 떠오른다. 멀리서 보면서 흐릿하게 ‘잎이나 꽃이겠거니’ 했던 이미지들은 가까이 가면, 선을 하도 그어대서 헤진 듯 보송보송 일어난 캔버스다. 화가에게는 그리는 맛을, 관객에게는 보는 맛을 선사한다.

그에게 그린다는 건 평면 위에 입체를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 그런 게 아니다. 소걸음처럼 천천히 반복하는 붓질로 그는 그린다는 문제를 끈기있게 물고 늘어진다. 유행을 타지 않고 기본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꽃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리고 있는 것이 꽃이 아니라 길이거나 강이거나 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주 가는 붓으로 촘촘히 작업하다 보면 부분만 보이거든요. 결국 전체를 보는 것과 부분만 보는 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시점의 문제입니다.”

#선으로 빚다.

조각가 정광호(49·공주대 교수)는 구리선을 땜질해 이어 달항아리, 과일, 잎사귀, 거미 등을 만든다. 금빛의 가는 선들이 그물처럼 엮이며 만들어내는 입체다.

사람 키보다 큰 달항아리는 전시장 한가운데 떡하니 있으면서도 공간을 지배하지 않고 조용히 바닥과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구리선의 공간 드로잉, 작가는 94년 이 구리선 조각들을 ‘비조각적 조각’이라고 이름붙였다. 선으로 빚은 이 조각품들은 회화를 닮았다. 바닥에 그림자를 그려내고, 반대쪽 공간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왜 조각을 하느냐는 물음이 나올 법하다. 이에 그는 “더러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색을 이리저리 섞어 보고 싶다. 조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는 기본으로 돌아간다. “마음에 차는 재료가 없어 가장 기본적인 철사와 선을 다룬다”라며.

#그래서 같이 전시한다.

김홍주의 가는 선들은 자기가 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무수히 어우러져 면을 이룬다. 정광호의 구리선 조각은 볼륨이 없다. 달항아리를 통해 반대편 세필화를 새롭게 보여준다. 정광호의 ‘비조각적 조각’은 이렇게 주변 풍경을 끌어안는다. 자기 존재를 강요하지 않되 기본에 충실한 작품들. 그래서 이들은 한 공간에 어우러진다. 대전서 작업하는 두 작가 역시 열 네 살의 나이차에 무관하게 잘 어울린다. “우리 둘 다 가난한 촌놈들이라, 재료비도 운반비도 적게 드는 작업을 하는 것”(김홍주), “몸으로 떼워 만든 작품은 접어서 직접 운반해 전시장에 와서 펼친다”(정광호)고 농담을 할 정도로 친하다. 김홍주의 회화 21점, 정광호의 조각 24점이 홀로 혹은 함께 있는 전시는 18일까지다. 02-720-1020.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