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아이

깡다구와 실리외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가토 고이치(加藤紘一·69) 전 일본 자민당 간사장은 ‘친한파’다. 독학으로 익힌 한글을 대부분 읽을 줄 알고 웬만한 회화도 가능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불고기와 잡채다. 흰 밥에 고추장을 듬뿍 비벼 먹는 일본 정치인은 아마 그가 유일할 게다. 그가 주도해 여야 의원과 한반도 문제를 기탄없이 논의하는 모임의 이름도 ‘비빔밥 모임’이다. 그런 그가 최근 기자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난 말이지,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 있는데도 한·일 관계가 나빠진다면 그건 100% 일본의 책임이라고 생각해.”

일본은 실리외교를 내건 이 대통령이 오랜 기간 경색된 양국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정치권이 이 대통령 못지않게 기대를 거는 인사가 바로 친형인 이상득 부의장이다. 일본 정치권에 폭넓은 인맥이 있는 데다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품이 높은 평가를 얻은 것 같다. 그런 이 부의장이 18대 국회의 한·일 의원연맹 회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현 상황에선 가장 적임자로 보인다. 지난 5년간은 두 나라 의원외교가 작동불능 상태였다. 이 부의장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 이유다.

이 부의장을 평소 ‘형님’이라고 부르는 권철현 주일대사가 농담 섞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형님, 아니 형님이 동생인 이 대통령보다 못난 게 뭐가 있습니까. 형님이 키도 더 크고 더 좋은 대학 나왔고, 정치 경륜도 많고, 게다가 형님도 대기업 최고경영자(코오롱)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 정치 경력도 그렇고 내가 위일지 모르지. 하지만 딱 하나, 나에게 없는 걸 명박이는 갖고 있어.” “그게 뭡니까.”

“깡다구야.”

답은 나온다. 아무리 실리외교를 추구한다고 해도 이 대통령이나 한국 정부가 부득이 일본에 맞서는 때가 반드시 올 게다. 맞서고 싶지 않아도 말이다. 때로는 그게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역할은 깡다구 있는 이 대통령에게 맡기면 된다.

하지만 동시에 물밑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보듬어 문제를 풀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한·일 의원연맹 회장의 역할이다. 그런 자리에는 깡다구보다는 조정력 있는 인물이 더 적합하다. 노무현 정권 5년간은 그걸 못했다. 너도나도 ‘깡다구’로 맞서는 바람에 ‘깽판’이 났다. 가토 전 간사장이 이 대통령 외에 굳이 이 부의장 이름을 거론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역할 분담이 필요한 것이다.

또 하나의 역할은 일본의 ‘공기’를 제대로 전하는 일이다. 요즘 일본에선 ‘KY’란 단어가 유행이다. ‘구키 요메나이’란 ‘공기를 읽지 못한다’, 즉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 정부가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일본의 부품·소재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에 투자해 달라”며 오래된 레퍼토리를 또다시 꺼내고 있는 것도 ‘KY’에 가깝다. 일본에는 한국보다 더 파격적인 기업 유치 조건을 내거는 지자체가 줄을 서 있다. 굳이 한국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부품소재 산업의 핵심은 기술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핵심 기술 여기 있소”라며 해외에 노출할 기업은 없다.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 일본대사가 지난달 30일 “(대책을) 논의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일본의 기류를 상징한다.

차라리 일본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 환경 부문에서 한국의 실리를 지혜롭게 챙기는 게 어떨까. 중국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나라 한·일이 손을 잡는다는 명분만 세워주면 일본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실리콘 밸리’아닌 ‘한·일 환경 밸리’를 부산·후쿠오카(福岡) 등에 공동 설치하는 것이다. 거기서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의 클린에너지, 에너지절약형 기술을 얻는 게 한국으로선 부품기업 몇 개 유치하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더 짭짤한 실리외교가 될 것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