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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바, 구경거리인가 사회 해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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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감독은 단지 호스트바를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왜’ 보여주는 것인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깊이깊이 고민했어야 한다.
대신 역겨운(beastie) 소년들(boys)이나 여성에게 귀여운 곤충(beastie)이 된 소년들이 등장할 따름이니…

뛰어난 데뷔작은 차기작을 만드는 데 장애가 되는가, 발판이 되는가.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어버린 감독들을 보면 전자인 것 같고,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발전시키는 감독을 보면 후자인 것 같기도 하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름난 영화로 데뷔한 감독들이 그만큼 큰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어린 감독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윤종빈처럼.

그는 대학교 졸업 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상한가를 기록했다. 아마추어(적인) 배우(당시 하정우는 이름 없는 배우였다)와 스태프가 모여 만든 장편영화는, 신선한 문제의식과 깔끔한 연출, 깊이 있는 내용, 진지한 자세 등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존 영화에서 숱하게 다루어 왔던 군대 이야기였지만, 군대의 폭력성을 이처럼 날카롭게 해부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풍자의 대상이나 유머의 대상으로 군대를 그리지 않고 진중하게, 제대로 해부한 힘은 저예산 영화의 힘, 젊은 감독의 힘이었다.

많은 이들이 기다려 왔던 윤종빈의 두 번째 작품, 실상 충무로 데뷔작도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두 명의 군인이 두 명의 호스트로 변했다고 해야 할까.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하정우가 제대 뒤 호스트가 되었다면 아마 이런 영화이지 않을까. 그런데 전작과 달리 볼거리가 풍성해졌다. 두 명의 인물과 두 명의 여배우가 등장하면서 네 명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고, 이들에 의해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인물뿐 아니라 배경도 확 달라졌다. 청담동의 호스트바를 배경으로 젊은 문화를 화면 속에 고스란히 살려 놓았다.

영화의 외양도 많이 나아졌다. ‘추격자’로 최고의 스타가 된 하정우와 이제는 연기자로 완벽하게 거듭난 윤계상의 듀엣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초반부의 눈이 번쩍 뜨이는 롱테이크다. 호스트바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가는 이 장면은 윤종빈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연출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화 내내 영상과 조화를 이루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의 성과는 여기까지다. 한국영화가 위기를 넘어 ‘공황’이라고까지 하는 이 마당에 ‘비스티 보이즈’를 보면서 나는 몹시도 답답했다. 나 역시 청담동의 호스트 문화를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놓은 초반에는 호기심 어린 구경을 할 수 있었지만 초반이 지나면 영화는 이내 지루해진다. 네 명의, 아니 두 남자의 감정선을 따라가기에도 벅찰 만큼 편집은 매끄럽지 못하고, 내용도 끊어진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감독이 호스트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마저 헷갈린다.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의 한 단면을 해부하기 위해, 그러니까 첨단 자본주의를 해부하려고 여성에게 웃음을 파는 상품화된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 것인가, 아니면 단지 새로운 구경거리로 관객들에게 소구하기 위해 다룬 것인가. 솔직히 후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의 남성적 시선과도 닿아 있다. 여성 못지않게 상품화되는 처절한 남성을 그리고 있지만, 그 과정과 그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남성적 판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타지의 주인공은 윤계상이 연기한 승우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관객이 승우에게 동일시되어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왜 남성은 도피하고 여성은 살해당하는 것일까. 감독은 단지 호스트바를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왜’ 보여주는 것인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깊이깊이 고민했어야 한다. 관객들은 새로운 풍경을 구경하려는 욕망도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왜,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그리는지 궁금해 한다.

결정적으로 영화에는 그것이 빠져버렸다. 대신 역겨운(beastie) 소년들(boys)이나 여성에게 귀여운 곤충(beastie)이 된 소년들이 등장할 따름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인가. 어쨌든 몇 걸음 더 나가야 할 상황에서 한 발만 내디딘 채 머뭇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윤종빈은 아직 젊다. 나는 그가 더욱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강성률(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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