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연타석 홈런 … 9이닝 20탈삼진 … 신화는 계속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호 26면

대통령배의 전설을 쓴 주역들은 대개 투수였다. 원년대회에서 경북고를 우승으로 이끈 임신근(왼쪽)은 절묘한 커브로 한 시대를 수놓았다. 김시진(가운데)은 우승은 차지하지못했지만 생명력이 길었다. 뒷날 메이저리그 투수가 된 김병현은 고교시절 타격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구를 했다. 야구를 해본 적이 없는 대통령의 시구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멋쩍게 웃으며 마운드를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공을 달라고 했다. 한 번 더 던졌는데 스트라이크였다. 내 기억으로는 야구대회에서 두 번 시구한 사람은 박 대통령뿐이다. 그는 마운드를 내려오며 엄지를 우뚝 세웠다.”

살아 숨쉬는 대통령배 고교야구

1980년 광주일고 선동열이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환호하고 있다.

2005년 11월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구로 시작한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의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했다. 명칭 그대로 대통령이 역사의 시작을 알린 1967년 봄. 『한국야구사』(한국야구위원회-대한야구협회 발간)는 그해에 고교야구 전성시대가 시작됐다고 정리한다.

대통령배는 중앙일보 계열사였던 동양방송(TBC)이 다른 고교 대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중계를 늘렸고 1회 대회부터 명승부가 쏟아지면서 인기 있는 대회가 됐다. 숱한 명승부는 대통령배를 수많은 ‘전설’로 장식했고, 42차례 플레이볼이 선언되는 동안 내 학교, 내 고장의 소년 영웅이 탄생했다. 10년 주기로 화려하게 꽃핀 전설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야구 천재 임신근, 경북고 신화 시작
원년(67년) 대회 최고의 스타는 왼손투수 임신근(작고)이었다. 경북고 2학년이었던 임신근은 결승에서 주무기인 슬로커브로 김우열이 이끄는 선린상고를 3-0으로 요리했다. 훗날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사령탑이 되는 경북고 서영무 감독이 첫 우승을 맛본 대회이기도 하다. 임신근은 이듬해 대통령배서도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그로부터 70년대 무적 경북고 신화가 시작된다.

트로이카 1기
대회 개막 10년을 맞은 76년. 드디어 군산상고가 위용을 드러낸다. 대형 투수 김용남을 투타 겸비한 김성한이 돕고, 승부처에서 김종윤이 방망이를 번득였다. 결승에서 대구상고를 1-0으로 누르고 처음으로 대통령배를 거머쥐었다. 대구상고의 에이스는 김시진. 9회 초 김종윤에게 결승타를 내준 김시진이 마운드에 주저앉아 탄식하는 장면은 애처로웠다. 2인자의 눈물은 그때 시작됐는가.

고교 마운드의 황금기였다. 김용남ㆍ김시진ㆍ최동원(경남고)이 일시에 떴다. 서울에서는 나중에 MBC 청룡의 주축이 되는 선린상고의 잠수함투수 이길환, 신일고의 김정수가 착실히 성장했다. 그러나 서울 야구는 불운했다. 김정수는 청룡 시절 교통사고로, 이길환은 은퇴 후 지병으로 요절했다. 거포가 될 줄 알았던 신일고의 차용갑은 크지도 못하고 시들었다.

황금의 시절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선린상고ㆍ천안북일고ㆍ광주일고가 고교야구 판도를 3분한다. 선린상고는 80년 4개 대회에서 팀 타율 3할2푼1리의 가공할 공격력을 뽐냈다. 2학년 김건우는 무려 4할7푼을 쳤다. 이해에 박노준이 ‘오빠부대’의 탄생을 알렸다. 그는 선린상고가 부산상고를 15-1로 두들기고 우승한 13회 대회(79년)의 MVP였다.

80년. 광주일고가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수퍼스타를 배출한다. ‘무등산 폭격기’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이다. 선동열은 광주상고와의 결승전에서 7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팀을 승리로 이끈다. 지난해 대통령배 우승팀인 광주일고의 감독 허세환은 이 대회에서 타격 전 관왕(5관)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트로이카 2기
90년 24회 대회. 심재학이 투타 만능을 뽐내며 충암고를 정상에 올린다. 이듬해 임선동(휘문고)ㆍ조성민(신일고)ㆍ염종석(부산고) 트로이카가 맹위를 떨친다. 특히 임선동은 대형 스타였다. 25회 대회 1회전에서 대전고를 상대로 9이닝 20탈삼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연세대를 졸업한 뒤 일본 진출을 원한 임선동은 연고권을 가진 LG구단의 반대에 맞서 승강이를 벌이느라 재능을 많이 잃었다.
지금 KIA에서 뛰는 광주일고 김종국은 꼭 기억해야 할 선수다. 충암고와의 2회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75년 이 대회 결승에서 광주일고의 거포 김윤환이 고교 제일을 자랑하던 경북고의 에이스 성낙수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두들긴 뒤 16년 만에 나온 기록이었다.

메이저리거의 산실
96년 30회 대회 최다안타상은 광주일고의 김병현이 받았다. 그는 나중에 메이저리그 투수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는 9안타를 친 일류 타자였다. 2000년대를 여는 34회 대회에선 대구상고 이정호와 부산고 추신수가 등장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박찬호가 LA다저스로 간 뒤 동대문구장은 파란 눈의 스카우트들로 붐볐다. 특히 고교 첫 대회인 대통령배는 스카우트들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통령배는 예선을 거쳐 올라온 지역 최고 팀들이 맞붙는 시즌 첫 대회라 선수와 감독 모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추신수의 경우 대통령배를 마친 뒤 시애틀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었다.

새 구장 새 시대
2007년 가을을 끝으로 동대문구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동원의 경남고 야구부가 한 방에 10명씩 뒤엉켜 잠을 청하던 초원장도 사라졌고, 방망이 가리방(배트 앞 부분에 홈을 파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 해주던 목공소도 간데없다. 김시진과 최동원, 고교야구를 이끈 두 영웅은 중앙일보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스탠드에 꽉 들어찬 선후배와 관중의 함성에 던질 맛이 났다”고 고교 첫 대회를 추억했다.

대통령배도 성동원두를 떠났다. 하지만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최선을 다한 승부가 가르쳐 주는 숭고한 가치는 변함없다. 김시진은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얻어맞은 3루타를 떠올리며 “패배의 아픔을 통해 성장했다”고 말했다. 아파트가 밀집한 목동에 새 보금자리를 얻은 대통령배가 지난 토요일 끝났다. 지금 목동구장에서 흘리는 땀과 눈물은 10년, 20년이 지난 뒤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