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59. 조영남, 미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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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막역한 후배 가수인 조영남과 함께 한 필자.

본의 아니게 후배의 노래를 가로챈 적이 있다. 하지만, 맹세코 길 선생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했던 것을 굳이 내가 부르겠다고 나선 적은 없다. 몇 년 전 그 후배가 토크쇼에 나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꿈에도 모르던 일이었다. 그 주인공은 조영남이다. 유일하게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정겨운 후배다. 세상 물정에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나를 ‘띨띨이 누님’이라고까지 부르는 격의 없는 관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띨띨하기로 치면 조영남도 못지 않다. 그 띨띨한 후배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은 이렇다.

그 유명한 ‘신고산 타령’ 사건(조영남이 ‘신고산 타령’에 1970년 붕괴한 와우아파트를 빗댄 가사를 붙여 ‘신고산이 우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노래했다가 정권의 미움을 산 적이 있다)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에 갔던 조영남이 제대할 무렵 길 선생을 만나게 됐다. 그때 길 선생이 곡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 이래저래 힘든 시절을 보냈던 조영남은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당시 길 선생과 내가 살던 세검정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때 길 선생이 조영남에게 주기로 했던 곡은 ‘사랑하는 마리아’. 그런데 얼마 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길 선생 리사이틀이 열렸는데 거기에서 내가 그 노래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지금도 조영남은 ‘사랑하는 마리아’가 자기 노래였는데 ‘띨띨이 누님’이 가로챘다고 푸념한다. 40년이 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몇 년 전에야 그 얘기를 듣고 곰곰 기억을 되새겨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조영남에게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부부이기 이전에 음악적 동반자였기에 길 선생은 만든 곡의 대부분을 나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었다. ‘사랑하는 마리아’도 그랬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좋다고 하니 길 선생이 먼저 불러 보라고 했던 것 같다. 나도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로 시작하는 이 곡을 부르면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불러주는 노래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 엉뚱하기는 해도 거짓말을 할 리 없는 조영남의 기억이 사실이라면 한 곡을 두 가수에게 주기로 약속한 길 선생이 실수를 한 게 분명하다. 이미 고인이 된 분이니 확인할 길도 없다. 마음 약한 길 선생이 조영남에게 주기로 해놓고도 내가 좋다고 하니 내게 준 것이 아닌가 싶고, 조영남의 말처럼 눈치없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길 선생이 지나가는 말로라도 조영남에게 줄 곡이라고 했다면 나는 굳이 그 곡을 탐내지 않았을 것이다. 앨범을 내기만 하면 앨범 한 장에서도 두세 곡씩 히트를 치던 때라, 막 제대해 자기 곡 하나 없는 조영남에게 준 곡에까지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후배에게 제대로 사과 한번 해야겠다. 영남아! 미안해!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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