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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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1945(10) 『아니,그래서?』 은례의 목소리가 빨라진다.
『네 놈은 또 어디서 굴러먹던 무슨 뼉다귀냐 싶데요.그래서 그 왜놈 순사놈을 그냥 이마빼기가 터지게 받아 버렸지요.』 웃을 수도 없어서 은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일본순사를 받았는데 온전했을 리가 없다.게다가 춘식이 박치기는 어렸을 때부터 인동에는 알려진 솜씨가 아니었던가.
『잘했다.잘했어.헤엄 잘 치는 놈 물에 빠져 죽고,나무 올라가는 놈 떨어져서 죽는다더니,네가 그꼴이지.박치기 잘한다 하니까,받아도 사람을 보고 받아야지 어쩌자구 순사를 받았니.미련하기로는 너도 당할 사람이 없을라.』 은례가 먼산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빨리 해야지 이러다가는 밤이나 되어야 집에 닿을 것 같았다.내가 춘식이 말 듣는 재미에 갈 길도 늦추고 있네 싶다.
『그래저래 고생 좀 했지요.그래도 뭐 다 굶는 판에 콩밥이라도 먹고 있으니 속은 편하던데요.겨우 겨우 나오니 모가 한뼘은자랐더라구요.봄 한철 편하게 지냈다 생각하고 말았지요 뭐.』 은례가 혀를 찼다.
『그래…어떻게 어혈이나 풀었니.사람을 여간 심하게 다루는 게아니라던데.』 『사람이 무섭데요.눈에 불을 켜고 독을 쓰고 앉았으니까,왜놈들도 흘낏흘낏 곁눈질만 하더라니까요.』 『에이구,녀석아.네 엄마 속이 어땠겠니.다 썩어문드러졌을라.』 옆으로 다가서며 춘식이가 업혀 있던 명조를 받았다.아이를 번쩍 들어 무동을 태우고 춘식이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내 이거 하나만 네게 일러 두마.여자란 한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남편 섬기고 자식 거두고,그거보다 더 큰 일이 없단다.여자가 그렇게 집안을 다잡고 지켜야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람구실을 하는 거야.집안이 구순한데 무슨 안되는 일이 있겠니.집 동네가 가까워온다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가슴에 와 겹으로 쌓인다.
그 어머니가 아무래도 얼마 넘길 것 같지 않다는 말을 춘식이가 전했을 때,은례는 마당가에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이제난 어떻게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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