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 기자의 영화 ? 영화 !] 한국 애니메이션의 ‘번개호’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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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근 가수 비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5월 8일 개봉)의 시사회에 갔다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초반에 흘러나온 음악 때문이었지요. 영화 속에는 멜로디뿐이었는데, 그 멜로디가 귀에 낯익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에 맞춰 노랫말까지 자동으로 떠오르더군요. “세계를/주름잡는/용감한 번개호∼”하고 말입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 어깨를 두드리는 것처럼, 잠시 울컥하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런 기분을 맛본 것은, 영화의 원작인 일본 TV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1967)가 70년대 한국에도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던 까닭입니다. 당시 일제인지 국산인지 알 리가 없었겠지만, 어린 시절 말랑말랑한 두뇌에 그 주제가가 생생히 각인됐던 겁니다. 뒤늦게 깨달았습니다만, 당시 주제가는 일본 원곡에 한국어 가사를 붙였던 것이지요. 그 원곡을 이번에 영화음악으로 활용한 것이고요. 원작 애니는 미국에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40여 년 전 일본에서 뿌린 애니메이션의 씨앗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피드 레이서’로 이어졌다는 얘깁니다.

사실 역사만 되짚으면 한국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일본 최초의 극장용 애니 ‘백사전’이 만들어진 게 58년인데, 이후 10년이 채 안 된 67년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홍길동’이 나왔지요. 실사영화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로보트 태권브이’(1976)의 인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한동안 창작 애니가 크게 위축되기도 했습니다만, 국내 업체들은 미국·일본 작품에 꾸준히 OEM형태로 참여해 왔습니다.

90년대 후반 한국 애니 부활론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습니다. 역사적 전통과 축적된 기술에 창작력이 더해지면, 국산 애니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였지요. 그에 힘입어 몇몇 극장용 장편이 야심 차게 만들어졌는데,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니메이션 강국’ 운운하는 청사진이 이제 미덥지 않게 들리곤 합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요. 6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도 그 예입니다. 칸영화제처럼, 애니메이션계에서는 세계적인 행사지요. ‘마리 이야기’(2002년)와 ‘오세암’(2004년)이 차례로 극장용 장편부문의 대상을 받아 한국 애니의 성가를 높였던 바로 그 무대입니다. 올해에도 TV스페셜 부문에 김운기 감독의 단편 ‘원티드’(사진)와 TV시리즈 부문에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이 제작한 ‘로우 인베이더’와 ‘떴다 그녀’ 등 2편이 각각 경쟁작에 올랐다는 소식입니다.

젊은 창작자들의 땀방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내친김에 마저 불러볼까요. ‘달려라 번개호’의 주제가는 이렇게 끝납니다. “내일의/희망 안고/번개호는/간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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