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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노통이 ‘노간지’가 된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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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얼마 전 중앙SUNDAY를 보고 봉하마을에 가보고 싶어졌다. 우리의 시끄러웠던 전임 대통령이 내려가 사는 고향 마을 말이다. 평일에 3000명, 주말엔 그 배가 넘는 관광객들이 그곳을 찾고 있다는 거다. 날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무슨 일이라는 게 재미있다. 마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나와주세요” 외치면 카우보이 모자를 쓴 옛 대통령이 손을 흔들며 나온다는 거다. 밥 먹다 말고도 나오고 차 마시다 말고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 우리의 전임 퍼스트레이디는 몸살까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 ○○:○○경 나오실 예정입니다’라는 ‘다음 공연’ 안내판까지 붙는다고 한다. 나와서는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강냉이 같은 먹을 것을 주는 관광객도 있다고 한다.

기사를 읽으며 외람되게도 놀이공원 ‘물개 쇼’가 떠올랐지만 그날 내내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다녔던 것은 쇼 때문이 아니라 가슴속 울림이 그만큼 오래갔던 까닭이었다. 나는 ‘노빠’도 아니고 노사모 회원도 아니며 오히려 재직 시절 그를 욕할 때가 더 많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솔직히 멋져 보인다. 퇴임 후에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헛되이 용쓰는 모습이 아니라 서민들과 함께 숨쉬며 지역사회를 위해 땀 흘리는 동네 이장 같은 그런 풍모가 말이다.

재직 시절 그토록 인기 없던 대통령을 보러 오는 사람들 탓에 마을 입구부터 길이 막히고 노점상까지 줄지어 들어서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멋지다’는 뜻의 속어가 붙어 ‘노간지’라는 별명이 새로 생겨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터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으로서 꼭 필요한 권위마저 발로 찼던 옛 대통령의 권위가 퇴임 후에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침묵의 힘이 가장 커 보인다. 우리의 옛 대통령은 퇴임 이후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의 질문에도 많이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특유의 파격적이고 직설적인 말의 향연보다 손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슬리퍼를 신고 담배를 피우는 인간적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발견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보다 행동이라는 얘기다.

이런 침묵의 가치를 지금 대통령도 배웠으면 좋겠다. 많은 부분 전임자와 닮은꼴인 것 같아 하는 소리다.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걱정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차근차근 행동으로 보여주면 될 것을 공연히 말을 앞세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얘기다. 차분하게 북한을 대하면 되지 “못 줘서 안달하지 않겠다”는 말을 자꾸 해서 자극하면 뭔 이득이 있느냐는 거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과의 우정을 넘치게 강조한 것도 결국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공격받는 빌미가 된 게 아니냐는 거다. 틈날 때마다 자원외교를 외치는 것 역시 값을 흥정해야 할 장사꾼 앞에서 물건을 꼭 사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것과 뭐 다르냐는 거다. 자신이 주변 사람을 그렇게 뽑아놓고 “부자들이 모였다는 인상을 줬다”고 질책하면 국민들이 뭘 느끼겠느냐는 거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았던 이탈리아인 점성가 프리미 비스콘티는 자기 책 『루이 14세』에서 왕을 이렇게 묘사했다. “왕의 얼굴을 한번 보라. 그의 표정은 도대체 읽을 수가 없다. 각의를 열 때가 아니면 국사를 입 밖에 내지도 않는다. 신하들에게 얘기할 때는 각자의 권리와 의무만 얘기해줄 뿐이다. 그 결과 루이 14세가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마치 신탁에서 나오는 말처럼 귀를 기울인다.”

지금까지 기억되는 루이 14세의 말은 “짐이 곧 국가다”란 한마디뿐이다. 하지만 그의 권위는 전 유럽을 뒤덮을 만큼 크고 무거웠다. 우리 대통령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퇴임 후에 사랑받는 두 사람의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중 한 명은 임기 중에도 인기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