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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도보기행 ② ‘파세자타’의 도시 오르비에토

중앙일보

입력

창공의 도시 오르비에타 - 삶은 느리게 지속된다

이탈리아 도보여행가 권오경(32)과 함께 하는 시간, 이번에는 로마 근교 도시 중 산책의 천국으로 유명한 ‘오르비에토’로 떠나보자.

창공의 중세도시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토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달려가면 나온다. 해발고도 200미터 의 바위산 위에 새둥지처럼 틀어 앉은 지형이다. 전쟁이 잦았던 중세의 유럽에는 이러한 요새 같은 마을이 많았다. 인구 2만의 작은 도시인데도 이 근방 농업마을의 중심지인 오르비에토는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마을이다. 하지만 전 세계 중세도시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백포도주가 맛있기로도 유명해서 로마 사람들 역시 기차를 타고 종종 이곳을 찾는다. 오르비에토 역에 도착하면 딱 하나의 고민거리가 있다. 어떻게 저 산 위에 있는 ‘창공의 마을’에 닿을 것인가. 차를 타고 마을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답은 하나다. 걸어야 한다.

“차 타지 말고 걸어오세요”
차량통제를 법제화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 간의 의견이 분분했다. 관광객을 유치해도 부족할 판에 차량통제라니…!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제안이다. 하지만 관광객 유치로 인해 마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일부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다. 마을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순수미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창 논쟁이 불이 붙었을 때 마을 사람들의 인식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차량이 너무 많이 지나다녀서 지반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목격한 마을 시장과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있는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련없이 ‘슬로우 시티’를 선언했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무엇이든 천천히 자연과 함께 발 맞춰 나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곳에 ‘슬로우 시티 국제본부’가 생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세계 환경가들의 이목도 모아졌다. 그리고 도시는 은근하게 분주해졌다. 친환경적인 삶을 지향한 순간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소 에너지를 개발한다거나 유기농 농업방식을 고집하는 등 이곳의 노력은 각별하다. 각종 에너지와 건전지 사용을 줄이다 보니 정말로 중세시대의 소소한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주민들도 흙을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공동텃밭을 많이 만들어놓았고, 밤에는 별을 실컷 따먹을 수 있도록 가로등을 거의 켜지 않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도 밤하늘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안 되도록 조도를 조절해 두었다.
이곳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젊은 시절에는 마음껏 꿈꾸고, 늙어서는 평화를 지으면 살자.”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고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지만 않는다면, 젊어 꿈꾸고 늙어 평화를 누리는 게 곧 현실이 된다.

슬로우 시티의 ‘느린 삶’
오르비에토에 탈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차는 없지만 케이블카는 있다.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오르비에토의 케이블카는 580m의 거리를 단 2분 만에 이동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부터는 시에서 운영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우리 돈으로 천삼백 원 정도면 케이블카와 마을버스 모두 이용할 수 있으니 저렴한 편이다.
무엇보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하지만 케이블카가 원래 이렇게 인기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가용 이용자 수가 많아지면서 거의 사장 위기에 처했다가 ‘슬로우 시티’ 정책 이후로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이다. 이제는 연간 14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오르비에토의 명물이 되었다.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다소 복잡하고 불편하더라도 환경운동에 동참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니 애초에 관광수익을 걱정해서 ‘슬로우 시티’ 정책을 반대했던 주민들의 우려는 기우였던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오히려 차량이 통제되다 보니 중세 도시 그대로의 풍경과 고요함을 지킬 수 있어서 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만족도는 기대치를 훌쩍 넘어선다.
이곳에서는 짜증을 유발하는 소음이나 패스트푸드점 등 ‘슬로우 시티’ 정책에 반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이유 없이 싸우거나 소리 지르면 곧바로 잡혀간다는데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단다. 시내 중심가라고 해봐야 성당을 중심으로 한 300미터 내외의 근방이지만, 백년 넘은 빵집이나 와인가게 수제품 상점 등이 아름답게 나열돼 있어서 관광객들을 행복케 한다.
유명한 빵집의 케이크를 맛보려면 서둘러 예약해야 한다. 방부제 없는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손님의 숫자를 미리 파악한 다음에 재료를 준비하고 케이크를 굽기 때문이다. 대형마트나 큰 상점이 없기 때문에 음식점 주인들은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재래시장까지 나서야 한다. ‘슬로우 시티’의 ‘슬로우 푸드’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장이 열리는데 계절별로 과일이며 채소 치즈 등등 이 지역 사람들의 음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렇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음식을 해 먹고, 무리를 지어 산책을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오르비에토 사람들의 자랑이자 정체성이다.

지하까지 이어지는 ‘파세자타’
이곳 사람들은 파세자타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산책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따로 내서 운동을 한다는 개념이 없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히 해야 하느 생명활동의 하나로 여긴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전후 시내 중심가를 향해 걷는다.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다. 에너지를 아끼고 밤의 정취를 더하자는 의미에서 불을 거의 밝히지 않으니 석양 속을 걷다보면 어느덧 캄캄한 길 위에서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 세계적인 슬로우 시티의 선명한 면모이다.
날이 추워서 관광객조차 받지 않는 동절기에도 파세자타 행렬은 여전하다. 매일 오후 6~8시만 되면 시청 앞 광장 ‘피아차 델라 레푸블리카’에 모여서 서로의 일상과 철학을 나눈다. 대개 시청에서 성당까지 산책행렬이 이어지는데 칠백 여 년 전에 지어진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고딕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당 주변으로 난 길을 20분 정도 따라 내려가면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있는데, 오르비에토 사람들의 감성과 솜씨가 그대로 드러난 공예품들이 가득하다. 그 물건들을 즐겁게 구경하는 외부인들, 그것과 무관하게 한적하게 산책을 즐기는 마을 사람들, 장삿속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상점 주인들의 느긋한 풍경까지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룬다.
오르비에토에서 꼭 들러야 할 또 다른 곳은 지하마을이다. 요새의 성격이 짙은 지하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의 생활상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곳은 화산암 지대라 지하에 굴을 파고 생활을 하기에 적당했다. 오르비에토 조상들은 로마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미 지하에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동굴 안에는 크고 작은 우물이 많고, 채소를 가꾸는 밭과 가축 사육장, 방앗간까지 그야말로 부족함 없는 완벽한 도시의 모습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비둘기 사육장이다. 입구를 터놓은 비둘기 집을 벼랑 입구에 놓아두고 귀소본능에 의해 자꾸만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비둘기를 가두고 잡아먹었단다. 지하 투어는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tip- 오르비에토는 겨울철에 숙소 운영을 하지 않는다. 하절기에는 관광객이 많으니 좋은 숙소를 구하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
오르비에토 마을 사이트. http://gram.eng.uci.edu/~alberto/orvieto.html
오르비에토와 같은 주 안에 있는 ‘아씨시’와 ‘움브리아’ 역시 아름다운 산책의 도시다.

사진 협찬 / 네이버 블로거 애플파이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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