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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실무책임 리성 주임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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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리성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右)과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 소장.

중국 학계에서도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은 소수 학설에 불과했으나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1978년) 이후 점차 다수설로 바뀌었다는 중국측 해석이 제기됐다. 이길상(46.교육학)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21일 "지난달 '동북공정'을 주관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실무 책임자 리성(聲.54)주임을 베이징에서 만나 동북공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며 " 주임은 1950년대 이후 고구려사를 보는 중국의 시각이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변해왔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특히 1950~60년대에는 북.중 우호관계를 배려해 고구려사를 한국(조선)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으며, 62~63년에는 북한과 공동으로 발굴한 중국 내 발해 유적의 절반 이상을 북한에 넘겨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신문화연구원 산하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는 李교수는 "리성 주임은 오는 6월로 예정된 '한.중 교과서 토론회'에 중국 사회과학원도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李교수는 지난달 24일 베이징 사회과학원에서 두시간 동안 진행된 리 주임과의 면담록을 공개했다. 다음은 그 요약.

이길상=동북공정의 예산 규모는.

리성=변강사지연구중심은 83년에 설립됐고, 동북공정은 2002년 2월 출범했다. 올해는 중앙정부에서 1000만위안(약 15억원)을 부담하고, 동북 3성 정부에서 100만위안(1억5000만원)을 부담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어떤 일을 진행 중인가.

리=동북공정은 연구.번역.출판 등 3개 영역으로 eho 있고, 과제 수로는 총80개 정도다. 이 중 40여개는 연구과제고, 나머지는 번역과 출판 일이다. 번역은 중-영, 중-일, 중-러, 중-한 등이다. 연구는 대부분 역사 관련 내용이며, 지리를 일부 다루고 있다. 이 외에 동북지방의 사회.교육.치안 등도 다루고 있다.

이=동북공정의 총책임자는 누구인가.

리=사회과학원의 왕뤄린(王洛林) 부원장이다.

이=그간의 성과는.

리=2002년에 시작해 2003년 초 마무리한 1차연도 사업 중 현재 10개 과제가 완료됐고, 그 중 6개 과제는 학술적으로 뛰어나 사회과학원에서 출판도 했다. 하지만 2개 과제는 전문가들이 좀더 검토 중이며, 나머지 2개 과제는 깊이가 떨어져 출간을 포기했다. 올해 말엔 청나라 때 동북지역에 대한 당안자료를 출판할 예정이다.

이=중국이 앞으로 교과서에서 고구려를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취급한다면 한.일 역사교과서 파동과 유사한 불행이 반복되지 않을까.

리= 한.일관계는 침략과 관련된 매우 정치적인 문제인 반면 한.중 역사 문제는 순수하게 학술적인 것이다. 역사 연구에서 서로 다른 학술적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태도다.

이=중국의 교과서 중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한 것도 있다.

리=고구려는 한나라와 당나라 사이의 시기에 중국의 중원에 소속된 나라였다. 한국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차이점은 속국에 대한 한.중 간 인식이다. 중국에서는 속국을 독립적인 나라로 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독립적인 나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의 그런 주장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다.

이=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학술세미나가 필요하다. 오는 6월께 중국에서 한.중 교과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사회과학원 측에서 주제 발표자를 추천해준다면 역사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리=언제든지 초청해준다면 참여해 토론하겠다. 이 기회에 중국에서의 고구려 역사 연구 흐름을 소개하겠다. 사실 송나라 이전에는 고구려로 표기했고 기록도 비교적 정확했다. 그러나 송~명나라 시기에는 고구려라는 개념도 몰랐고, 오류가 아주 많다. 명~청나라 시기에는 비교적 정확히 기재했다.

최초의 고구려사 연구는 20년대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고구려를 독립국으로 보았고, 따라서 고구려사를 독립된 역사로 묘사했다. 일본의 점령정책과 관련된 주장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0년대에 중국의 역사학자 김옥부가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점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50~60년대의 중국 사학계는 중국과 북한의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고구려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고구려사를 조선 역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62~63년에는 중국과 북한이 발해 유적을 공동 발굴해 유적의 절반 이상을 북한에 보냈다. 북한의 역사 연구에 도움을 주려는 배려였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 다수의 중국 역사학자가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의 학자는 김옥부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고구려 연구가 활성화되고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소수 관점이 활발해지다가 드디어 우세하게까지 됐다. 그러니까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70년대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정리=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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