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색 다른’ 외침 … 캔버스에서 제3의 길 찾는 젊은 화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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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운씨는 책을 갈아 뭉쳐 만든 종이판에 스테이크 소스로 영국의 새 20파운드 지폐를 그렸다. 가로 2m20cm 크기로 확대한 지폐엔 자유주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초상이 들어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현주씨의 ‘숭배받는’(20×22㎝)<上>, ‘무슨 꿈이 올까’(38×50㎝)<下>는 알루미늄판에 자동차 도료로 그렸다. 색과 형태로 말하는 회화의 기본에 단단히 발 디디고 있다. [성곡미술관 제공]

“어서 오라, 인생이여! 나는 백만 번이고 나아가 경험의 진실과 마주칠 것이며 영혼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이 미처 창조하지 못했던 양심을 만들어낼 것이다.”

아일랜드의 문호 제임스 조이스(1882~1941)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썼던 구절이다. 요즘 미술관들이 다투어 소개하고 있는 신진 작가전에서도 이런 젊은 혈기가 펄펄 끓는다. 발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펼쳐 놓고 ‘어서 오라 인생이여’라고 대담하게 외친다.

종이판에 영국의 20파운드 지폐를 커다랗게 그렸다. 물감 대신 영국 스테이크 소스를 썼다. 책 한 권을 통째 분쇄해 종이판을 만들었다. 시장에서 작가로 성공하는 법을 다룬 가이드 북(『Artist’s Guide to Selling your Work』)이다. 갈아 없애는 것이 장기인 신기운씨의 신작이다.

그는 지난해 세계 각국의 돈을 분쇄하는 영상으로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은 신예다. 한글인데도 읽기 어려운 미술이론서를 분쇄한 후 간장과 커피로 1만원권 지폐도 그렸다. 작가는 먹는 것을 물감 삼아 “작업으로 먹고 사는 것”을 재치있게 빗대면서 동시에 시장에 함몰된 미술을 꼬집었다.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02-2124-8800)서 6월 15일까지 열리는 ‘SeMA 2008-미술을 바라보는 네 가지 방식’전의 한 장면이다. ‘SeMA(Selected eMerging Artists)’는 이 미술관이 격년으로 진행해 온 신진작가 소개전이다. 미술에 대한 기본적 태도인 ‘선과 색의 울림’, 젊은이다운 외침을 다룬 ‘물로 쓴 슬로건’, 일탈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상상의 틈, 괴물 되기’,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다룬 ‘일상의 발견’ 등 네 가지 섹션으로 나눠 보여준다.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02-737-7650)도 5월 25일까지 별관에서 ‘2008 내일의 작가-이현주전’을, 본관에선 ‘내일의 작가 1998∼2007’을 함께 소개한다. 신인에서 중견으로 넘어가는 35세 안팎의 젊은 작가를 소개해 온 10년간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다.

올해 선정된 이현주씨의 회화는 알루미늄판에 자동차용 도료로 그려 매끈하고 영롱하다. 색으로 말하는 기하학적 추상화에 ‘무슨 꿈이 올까’‘밖에 누구 없나요’ 등의 제목을 붙였다.

역대 ‘내일의 작가’는 김태헌·김남진·강운·윤동천·전준호·임만혁·신영옥 씨 등 한국 미술계에 굳건히 자기 자리를 잡은 이들이다. 물리학도 출신으로 파리에서 새로 미술공부를 하고 작가로 살아가던 김형기(2000년 선정)씨가 국내 활동의 계기를 잡은 것도, 해외서 활발히 활동 중인 신미경(2001년 선정)씨가 대표작 비누 조각을 국내에 처음 선보인 곳도 이곳이다. 지난해 ‘신정아 사건’으로 기능이 거의 정지되다시피했던 성곡미술관이 다시금 미술관의 역할과 방향을 다잡았다.

올해 말에는 가장 오랜 신진 작가전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2008’이 대미를 장식한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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