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년된 보리수 …‘붓다의 흔적’곳곳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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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인 이수루무니야. 사원이 생기기 전에는 바위동굴에서 스님들이 수행했다고 한다.

스리랑카 불치사에 모셔진 부처님 치아사리를 본떠 상아로 똑같이 만든 모형.

남방에는 ‘3대 불교 국가’가 있다. 태국과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다. 석가모니 부처는 인도 북부(지금은 네팔땅)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설법을 하다가, 인도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지금 인도의 주된 종교는 힌두교다. 불교 신자는 1%에 불과하다. 반면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 3개국은 국민의 70% 이상이 불교를 믿는 ‘불교 국가’가 됐다.

16~21일 경기 부천 석왕사(주지 영담 스님) 신도들과 함께 스리랑카를 찾았다. 요즘은 한국 스님들도 스리랑카를 꽤 찾는다.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공부해 부처님 가르침의 본모습을 찾기 위함이다. 그만큼 스리랑카에는 경전 연구를 기반으로 한 교학 불교가 발전해 있다. 그렇다고 수행 현장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무 밑이나 석굴에서 개인적 수행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의 맥은 이어지고 있다.

16일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내렸다. 공항을 나서자 후끈한 바람이 불었다. 기온은 30℃를 웃돌았다. 거리의 승려들은 얇은 천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곳곳에 불상이 서 있었다. ‘불교 국가’란 말이 절로 실감났다. 스리랑카의 인구는 약 1800만 명. 그런데 승려 수는 3만 명, 사원 수는 8200개가 넘는다.

이튿날 아침, 콜롬보에서 고대 왕국이 있던 아누라다푸라로 떠났다. 길은 모두 왕복 2차로였다. 고속도로가 없는 스리랑카에서 버스는 시속 30~40㎞가 고작이었다. 아누라다푸라에는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야가 있다. 어땠을까. 부처님 사후 200년(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들어왔던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기에는 어떠한 ‘원형질’이 담겨 있었을까. 그게 보고 싶었다.

이수루무니야 사원 입구에서 신발을 벗었다. 스리랑카 사원에선 승려도, 속인도 모두 신발을 벗어야 했다. 모래가 뜨거워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 구석은 바위굴이었다. 동행한 스리랑카 케라니야 대학의 다야 에디리싱헤(철학과) 교수는 “2300년 전, 스리랑카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스님이 이 석굴에서 수행했다”고 말했다. 그가 바로 인도 아쇼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드라 스님이다.

마힌드라 스님은 당시 5명의 승려와 함께 배를 타고 인도 남녘의 섬나라, 스리랑카로 왔다. 아무도 불교를 모르던 시절, 그는 석굴에서 햇볕과 비를 피하며 수행했다. 그리고 스리랑카에 불교의 싹을 틔웠다. 그래서 그가 수행했던 석굴에 사원이 세워졌다. 그게 바로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야다.

어찌 보면 달마 대사와 똑 닮았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 대사도 쑹산의 바위굴에서 9년간 면벽하며 제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 혜가를 만나 중국땅에 불법(佛法)의 뿌리를 내렸다. 마힌다 스님이라고 달랐을까. 그가 보낸 고독의 세월이 석굴에서 뚝뚝 묻어났다.

마힌다 스님이 뿌린 ‘씨앗’은 순식간에 퍼졌다. 거기서 멀지 않은 바위산으로 갔다. 그곳에는 무려 68개의 석굴이 있었다. 또 5m가 넘는 기다란 돌밥통과 돌카레통도 놓여 있었다. 다야 교수는 “여기에 재가불자들이 바나나 나뭇잎을 깔고 밥과 카레를 담았다. 그럼 바위굴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내려와 밥을 먹고 다시 올라갔다. 한때는 이 주위에 1만1000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수행했다”고 말했다. 현재 조계종 스님은 모두 1만3000여 명이다. 그러니 스리랑카에 몰아친 불교 열풍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만했다.

스리랑카 스님들은 요즘도 ‘오후 불식’을 지킨다.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승가에선 오전에 탁발을 나간다. 그렇게 얻은 음식을 나눠 먹고, 오후에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좌선이나 행선을 한다. 오후에는 탁발이 없으니 수행에만 전념한다. 대신 교육 중심 승가에선 탁발을 나가지 않는다. 신도들이 아침과 점심 공양을 사원으로 가지고 온다. 스님들은 경전 공부와 법회, 상담, 포교 등에 주력한다. 물론 이들도 ‘오후 불식’을 지킨다. 다야 교수는 “스리랑카에선 교육 중심 승가가 80%쯤 된다”고 말했다. ‘스리랑카=교학불교’로 통하는 이유가 있었다.

스리랑카에는 ‘붓다의 흔적’이 꽤 있었다. 인도의 이웃이라 그런지 그 흔적도 진했다. 아누라다푸라에서 2300년된 보리수를 만났다. 스리랑카의 ‘국보’였다. 무장한 경찰들이 주위를 지켰다. 2500년 전, 부처님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마힌다 스님의 여동생인 상가미타 공주가 인도에서 그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그게 2300년 전의 일이다. 그 뿌리에서 나온 보리수가 지금도 서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승려는 “얼마 전에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가 죽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보리수 뿌리 2개를 떼서 가져가 심었다”고 했다. 이 사실에 대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20일 스리랑카의 두 번째 도시 캔디로 갔다. 거기에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신 불치사가 있었다. 불치사를 찾은 현지 불자들은 저마다 동그란 연꽃을 두 손에 올렸다. 그리고 탑 앞에 꽃을 바쳤다. 산스크리트어가 딱딱한 독일어라면, 팔리어는 부드러운 프랑스어에 비유된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운율을 타며 노래를 부르듯이 팔리어를 읊조렸다.

“나모가또 바가와또 따마 따무 따사~(불·법·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두 손을 모은 그들의 눈망울이 물들지 않는 연꽃보다 맑아 보였다.

아누라다푸라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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