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불신 … 인재 양성 소홀 … 미국 최고 부촌이 빈민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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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영스타운 도심 일부. 한때 미국 최고의 부자 도시였으나 지금은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다. [사진=정재홍 기자]

‘하루 수천 톤의 철강을 생산했었는데/이제 당신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한다/한때 나는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줬다/내 이름을 잊을 만큼 엄청난 부자로’. 

미국의 록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1995년 부른 ‘영스타운’에 나오는 가사의 일부다. 그는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의 철강공장 폐업으로 실업자가 된 노동자 4만여 명의 상실된 삶을 노래했다. 영스타운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피츠버그·클리블랜드와 함께 미국 3위의 철강도시였다. 풍부한 석탄과 5대호로 연결되는 운하, 머호닝강의 풍부한 수자원 등으로 미국 최고의 부자도시였다.

그런 영스타운이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나락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9~13일 한국언론재단과 미국 동서센터가 후원한 한·미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했던 영스타운은 과거의 도시라는 인상을 줬다. 도심에는 수년간 돌보지 않은 건물들이 퇴락한 채 방치돼 있고, 한때 검은 연기를 내뿜던 제철소들은 잡초 무성한 까마귀의 보금자리가 됐다. 제철소들의 광활한 터가 옛날의 규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동네에는 주인 잃은 빈집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다.

조지 매클라우드 영스타운주립대 부총장은 “영스타운은 과거에 갇힌 도시”라며 “시민들은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보다 과거에 안주해 세계화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존 루소 영스타운주립대 교수는 영스타운의 몰락 원인으로 네 가지를 꼽았다. 지나친 철강산업 의존, 노조와 경영진의 불신·대립, 교육받은 인재 배출 실패, 정치 지도자의 부패 등이 악순환을 불러왔다는 설명이다.

음식점에서 만난 레너드 거비닉(63)은 “딸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영스타운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스타운도 변신하기 위해 몸부림은 쳤다. 2005년 영스타운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선출된 제이 윌리엄스는 “영스타운 부활의 핵심은 교육”이라며 “과거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문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까지 도심을 재건하겠다는 ‘영스타운 2010’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창업지원센터를 활성화해 제조업에서 하이테크산업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는 미약하다. 이 때문에 한때 16만 명에 이르던 인구는 8만2000명(2006년 기준)으로 줄었고, 이제는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다. 가구 중간소득이 연 2만1850달러(약 2185만원)로 인구 6만5000명 이상의 미국 도시 가운데 가장 낮다. 네 명 중 한 명은 빈민층이다.

영스타운의 추락은 7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과 신기술로 무장한 외국산 철강이 미국에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영스타운의 철강업체들은 외국 기업에 비해 생산성은 낮고, 인건비는 높아 경쟁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노조는 인력 감축과 임금 인하에 반대해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77년 9월 19일 대형 철강업체인 ‘영스타운 시트 앤 튜브’가 노동자들에게 쉬쉬한 채 갑자기 공장을 폐쇄했다.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시민들은 이날을 ‘검은 월요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 US스틸과 리퍼블릭스틸 등이 잇따라 공장을 닫으며 4만여 명이 쫓겨났고, 400여 개의 하청기업도 문을 닫았다.

영스타운 최대 일간지인 빈디케이터의 버트램 수자 논설위원은 “시민들은 지난 30년간 경제 악화의 원인을 외국 기업으로 돌리는 등 남 탓만 했다”며 “이제는 미래를 위해 새로 시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영스타운(미 오하이오)=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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