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럼>중앙은행의 시스템과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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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5년전 이야기 한토막.1970년5월1일자로 한국은행 총재에임명된 김성환(金星煥)씨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다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피스톨」박종규(朴鐘圭)경호실장 방으로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말을 하려고 찾아 갔다.朴씨는 金씨가 자기 사무실에 들어와 앞에 섰는데도 의자에 그대로 앉아양말을 벗고 무좀 걸린 발가락을 긁고 있었다.안내한 비서는 한국은행 직원으로서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파견된 사람이었다.
한은 총재가 말했다.『이번에 각하로부터 새로 임명된 한국은행총재 김성환 올시다.』경호실장이 말했다.『아 그래요.잘해 보시오.』한은 총재가 막 나오려는데 경호실장이 계속 앉아 발가락을긁고 있다가 물었다.『무슨 은행이라고 했더라.』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는 한국은행 동료들에게 전한 그 사람의 주석에 의하면 朴씨는 그때까지 한국은행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제일은행.한일은행도 아니고,한국상업은행.한국외환은행도아니고 달랑 한국은행은 무엇이며,행장이면 행장이지 총재는 또 뭐꼬? 이런 표정이더라는 것이었다.
朴씨와 金씨는 둘 다 고인이 되었다.그러나 한국에 있어 권력과 중앙은행의 관계는 발가락을 긁고 앉아있는 「피스톨 朴」과 그 사람 앞에 신임인사차 가서 서있는「한은 총재」사이로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 당시에 이 말을 들었던 내가 지금도 지니고있는 그림이다.
요 며칠 사이 밤벌레는 벌써 가을 음색(音色)으로 울기 시작했다.듣고 있으니 가을 기운을 일러 쇠기운(金氣)이라고 부르는오행(五行)체계의 직유적(直喩的)어프로치가 새삼 찬탄스럽다.금기락엄상(金氣落嚴霜:가을 기운이 찬 서리를 내린 다)계절은 얼마 안있어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 「변화와 개혁」의 세상이 되고부터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엄한 서리의 금기가 나라 안 가득 죽 번득여오고 있다.추상(秋霜)이란 사법(司法)의 다른 이름이다.옛날에 추관(秋官)이라고불렸던 사람은 지금으로 치면 검사(檢事)다.어 떤 필연,아니면어떤 우연이 검찰을「변화와 개혁」이라는 제목을 가진,이 끊어질듯말듯 하면서도 우레처럼 큰 소리로 이어지고 있는 활동사진의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것일까.차라리 지금 변화와 개혁은 검찰 혼자 출연하는 모노 드라마로 바뀐 것 같다.
사고(事故)vs 사건! 다리나 건물 같은 「하드웨어 사고」뿐만 아니다.한국은행 부산지점 폐기지폐 절취사고등의 「소프트웨어사고」도 「검찰사건」으로 그 전부가 빨려들어간다.물론 폐기지폐를 훔쳐가 사용한 도둑을 기소하는 것은 추상같은 검찰의 일이다.그런데 아무래도 한 말단직원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짓고 이 도둑 하나만 달랑 포승줄에 엮어가는 것으로는 이 사건의 무게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누구나 갖는 느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검찰의 일은 거기에서 그쳐야 했다고 본다.나머지 일은 검찰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경식(李經植)신임 한은총재가 『한은 개혁을 빠른 시일안에 마무리하겠다』고 밝혔지만 개혁의 핵심은 한은총재 혼자의 드라이브만으론 이루어낼 수 없을 것 같다.왜냐하면 개혁의 본모습이 한쪽으론 극단적으로 개인적이면서 한쪽으론 시스템 전체를 포괄하는 뭉터기 일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별 권한없는 어정쩡한 중간단위인 한은이 개혁할 수 있는 것은 고작직장내 직업윤리 교육과 내부 감독을 강화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앙은행을 둘러싼 시스템의 개혁은 재정경제원과 한은,한은과 일반은행 사이의 책임과 권한,협조와 견제를 분명히 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한은법이 어떻게 개정돼야 옳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재경원이 중앙은행을 겸하고 있는 것이면 그 장관은 지난번 조폐창은 물론 이번 한은사고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옳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최고 책 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두 사고는 명백히 「위조지폐」가 당국의 지붕아래서 발행된 것이다).지금 관행의 가장 나쁜 점은 좋을 때 권한은 힘있는 쪽이 차지하고,나쁠 때 책임은 힘없는 쪽이 덮어쓴다는 점이다.이래 가지고는 「절대로」개 혁이 달성될 수 없다.
항상 우리 시스템은 새는 바가지로 남아있게 된다.우리는 더 큰사고 위험으로 자꾸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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