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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컬럼>관철동시대50.93년 동양증권배 결승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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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서봉수와 오타케(大竹英雄)가 잉창치(應昌期)배를 놓고 막바지승부를 벌이고 있던 93년 봄,제주도에선 또하나의 흥미진진한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조치훈과 이창호,두 희대의 천재가 세계4대기전의 하나인 제4기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한 것이다.이때 조치훈 37세,이창호 18세.
조치훈은 6세때 숙부 조남철 9단의 손을 잡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당시의 떠오르는 별인 린하이펑(林海峰)9단에게 5점시험기를 두어 이긴 뒤 곧 바둑계 최고의 명문 기타니(木谷)도장에 입문했다.
처음부터 시련이 찾아왔다.까마득한 저 위에 기타니(木谷實)9단이 있었다.그 다음은 기도(棋道)정신에 누구보다 준엄한 가지하라(梶原武雄)9단이 도장을 호령하고 있었고 막 20대가 된 린하이펑과 쌍벽인 청년강자 오타케가 문하생들을 통 솔하고 있었다. 조치훈에겐 그들은 모두 대선생님이었다.그런데 세사람이 더있었다.훗날 「기타니도장의 삼총사」라 불리게 되는 14세의 이시다(石田芳夫),15세의 가토(加藤正夫),11세의 다케미야(武宮正樹)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기 싫어하는 조치훈을 데리고 치수고치기로 바둑을 두었다.5점에서 시작해 7점,8점,9점.조치훈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당대의 1인자 사카다(坂田榮男)9단과 정상에서 겨루는 린하이펑을 5점에 이겼는데 아직 프로도 아닌 이들에게 9점이라니….
신사 린하이펑은 어린 치훈의 사기를 위해 슬슬 뒀지만 씩씩한이시다 등은 전혀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기타니도장은 풍요로운 땅이었다.나중에 일본바둑을 휩쓴 인재들이 이때 도장에 다 모여 있었다.김인 9단도 때마침 그곳에 와 있었다.그 속에서 고집불통 조치훈은 바둑두다 울고 싸우다 울었다.
당시 도장의 사범이었던 김인9단은 이렇게 술회한다.
『치훈이는 투지가 대단했다.고집세고 말썽도 심해 여자애들을 잘 울렸다.그래도 선생의 부인은「객지생활을 하는 철부지」라는 이유로 항시 치훈이 편이었다.나중엔 누구도 치훈이하고는 싸우지않게 됐다.』 괴동환(怪童丸)이란 별호를 지닌 일본의 거목 기타니9단은 이런 조치훈에게서 일찌감치 대성의 싹을 본 것같다.
노년의 기타니는 누구보다 치훈의 손을 잡고 외출하기를 즐겼다.
69년 13세의 치훈은 일본기원 최연소기록을 세우며 입단의 관문을 뚫는다.일본에 온 또 한사람의 천재 조훈현이 프로가 된지2년 뒤였다.
조훈현의 스승은 세고에(懶越憲作)9단이고 세고에는 기타니의 스승 스즈키(鈴木爲次郎)의 라이벌이었다.세고에는 강성해가는 기타니도장을 응시하며 견제세력을 키웠으니 바로 관서기원의 총수 하시모토(橋本宇太郎),그리고 마지막으로 혈육처럼 키운 조훈현이다.기타니일문이 바둑계를 휩쓸고,기대했던 조훈현이 귀국해버리자낙심한 세고에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세고에가 좀더 오래 살아조훈현이 세계를 휩쓸고 조훈현의 제자로 이창호란 인물이 나타난걸 지켜봤더라면 그는 어떤 심정 이었을까.
조치훈은 점점 무서운 승부사로 커갔다.74년,그러니까 18세때 그는 획기적인 한해를 보내게 된다.그는 이 해에 사카다.후지사와(藤澤秀行).오타케.린하이펑,그리고 기타니문하 삼총사등 7인과 싸워 7전전승을 기록한다.6세때 하늘처럼 보였던 강자들,자신을 9점으로 놀렸던(?)선배들을 모두 잡고 명인.본인방(本因坊)2관왕에 빛나는 이시다도 꺾고 사카다와 일본기원선수권전결승에서 격돌했던 것이다(이때 이창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막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년후 조치훈은 일본의 모든 고수들을 무릎꿇게 만들었다.조치훈은 핏줄은 한국인이지만 일본 바둑계의 가장 비옥한 땅에서 일념으로 승부의 정수를 꿰뚫어온 정예중의 정예였다.
세월이 흘러 그 조치훈앞에 18세의 이창호가 나타났다.원숙해진 조치훈은 감회에 젖어 말했다.『이창호가 자랑스럽다.』 이창호는 이미 세계타이틀 보유자였다.최고 엘리트였던 자신의「18세」보다 한단계를 더 뛰어넘은 이창호의「18세」.그것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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