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7:2 구도 속 이홍훈·김능환 대법관이 ‘스윙 보트’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쿼 바디스?’ 지난해 대통령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우리 사회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기 시작했음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사회 변화의 속도를 좌우할 사법부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을까. 그 방향타를 쥔 대법관들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17일 대법원이 송두율 교수의 방북을 국가보안법상 탈출로 본 원심을 깬 것을 계기로 대법관들의 성향을 분석해 봤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한상희(건국대)·이국운(한동대)·임지봉(서강대) 교수에게 자문했다.

전원합의체 판결 작년 18건
전원합의체 판결 29건 중 12건은 ‘전원 일치’로 결론 났으나 17건에서는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으로 갈렸다. 대법원 내부의 시각이 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년의 경우 10건 안팎에 머물던 전원합의체 판결은 지난해 18건으로 늘었다.
소수 의견을 기준으로 대법관들이 어떻게 이합집산을 하는지도 살펴봤다.

박시환·김지형·전수안 대법관은 6건의 판결에서 팀워크를 과시하며 진보 성향의 소수 의견을 냈다. 이들은 지난해 3월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 파업 참가자 승진 취소 사건에서 “울산 북구청이 울산시장의 징계 요구를 무시한 채 오히려 승진시킨 것은 위법한 처분”이란 다수 의견에 맞서 울산 북구청 쪽을 지지했다. 같은 해 5월 상지대 이사선임 사건에서는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들이 정식 이사를 선임한 것은 유효”라며 학원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다수 의견이 “무효”라며 전 이사장 김문기씨 등의 손을 들어 준 데 반대한 것이다.

김영란 대법관은 전공노 판결 등 4건의 소수 의견에서 세 대법관과 보조를 맞췄다. 지난해 10월 출퇴근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경우 재해 보상금을 줄 것인지를 놓고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에 4명이 공동 대오를 형성했다. 업무상 재해 범위의 확대 여부를 둘러싼 이 판결은 이념 대결의 성격이 강했다.
보수 성향의 소수 의견을 주로 낸 이는 김황식·안대희 대법관이다. 두 대법관은 5건의 판결에서 ‘세트’로 소수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투자기관 임직원 업무에 변호사법을 적용할 수 없다”거나 “범민련 부의장의 방북 활동은 보안법 위반이 아니다”는 판결에 맞서 각각 반대, 별개 의견을 발표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진보 4 대 보수 2’의 형세다.

다수결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

다른 대법관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이용훈 대법원장과 고현철·김용담·양승태 대법관은 소수 의견을 많이 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 대법원장은 한 건도 없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장은 다른 대법관의 의견을 모두 들어본 뒤 다수 의견 쪽에 서는 경우가 많다”며 “대법관들에 대한 리더십을 유지하고 논란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김·양 대법관은 2~3건으로 집계됐다. 대법관 중 고참급에 속하는 이들은 중도 보수의 입장이지만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다. 박일환 대법관의 경우 5건의 소수 의견을 냈으나 정치적 사건에 대해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그렇다면 누가 대법원 판결 흐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이홍훈·김능환 대법관이 꼽혔다. 두 사람은 ‘합리적 스윙 보트(Swing Vote)’로서 때로는 진보 쪽에, 때로는 보수 쪽에 서면서 판결 흐름을 바꾸고 있다. 스윙 보트는 미국 대법원에서 진보와 보수 대결이 팽팽할 때 한쪽 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중도 성향의 대법관을 가리킨다. 2005년 은퇴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이 대표적인 스윙 보트였다.

이 대법관은 진보 성향, 김 대법관은 보수 성향이지만 사안에 따라 성향을 넘나들고 있다. 이 대법관은 전공노 사건과 상지대 사건에서는 진보 쪽에 섰으나 여타 사건에서는 박시환 대법관 등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김 대법관의 경우 ‘정부투자기관 임직원 변호사법 적용 불가’ 판결에서 안 대법관 등과 뜻을 함께했으나 출퇴근길 업무상 재해 판결에서는 김영란·박시환 대법관 등과 소수 의견을 냈다.

이국운 교수는 “대법관 13명 가운데 과반수인 7명을 확보하면 다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안별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2명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실제 ▶변리사 1차 시험 방식을 시험 직전에 바꿔선 안 된다 ▶사회 통념의 한도를 벗어나는 고율의 이자는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부동산 사기 이득을 산정할 때 근저당권 설정액은 빼야 한다 등의 판결이 나오는 데 두 대법관이 기여했다. 이념성이 강한 사건에서 보수 그룹이 진보 그룹을 8 대 5, 9 대 4로 이겼지만, 이념성이 약한 일반형사·행정 사건에서는 진보 쪽이 우위에 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수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 거의 모든 사안에 적용되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단순 구도에 그치고 있다”면서 “민사·행정이나 소송 절차와 같은 일반 사건에서는 두 그룹의 단결력이 발휘되지 않고 개인의 가치관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50대 대법관이 변화의 중심

과거 대법원은 보수 일색의 ‘닮은꼴’ 대법관으로 구성됐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이제는 다른 모습이다. 인적 구성이 다양해진 것이 1차적 요인이다. 2005년 11월 김황식·박시환·김지형 3명의 대법관이 취임한 데 이어 다음해 7월 이홍훈·박일환·김능환·전수안·안대희 대법관 등 5명이 입성해 대법원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진보 그룹 쪽의 대표 주자인 박시환 대법관은 2003년 대법관 제청 파문 때 서울지법 부장판사에서 물러난 법원 내 개혁 세력의 중심 인물. 김지형 대법관은 유일한 비서울대(원광대) 출신의 노동법 전문가이고, 김영란·전수안 대법관은 진보 성향으로 각각 여성 대법관 1, 2호를 기록했다. 보수 그룹의 김황식·안대희 대법관은 각각 법원행정처 차장, 대검 중수부장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6명이 50대 초·중반이란 점도 변화의 기폭제가 됐다. 대법관들은 판결문에 반대 의견이 나오면 ‘다수 의견에 대한 보충 의견’‘반대 의견에 대한 보충 의견’을 내놓고 상호 비판에 나서기도 한다. 한상희 교수는 “소장 법조인들이 대법원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주심을 맡지 않은 사건에도 관심을 갖고 챙기고 있다”며 “내부 토론이 활발해지는 등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행정부 독주에 잇단 제동

임지봉 교수는 전원합의체 판결에 ‘사법적극주의 대 사법소극주의’의 기준을 대야 한다고 제시했다. 사법적극주의는 행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소극주의는 그 반대다. 임 교수는 “1970년대 초반의 ‘1차 사법 파동’ 이후 행정부의 독주에 순응하는 사법소극주의 경향이 굳어져 왔다”면서 “최근 법원에서 적극주의 경향이 살아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전원합의체 29건 가운데 절반인 16건이 수사·세무·행정처분 등 행정부와 관련된 사건이다. 임 교수는 그중에서도 사법적극주의 여부를 확실히 감별할 수 있는 판결로 변리사 시험·상지대 사건과 ‘위법하게 압수한 물건의 증거 능력은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 등 3건을 꼽았다. 이 3건에서 모두 다수 의견, 즉 사법적극주의 쪽에 선 것은 이용훈·고현철·박일환 대법관이다. 반면 1건에서만 다수 의견에 참여한 안대희 대법관은 사법소극주의 쪽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된다.임 교수는 “미국에서는 판결 성향을 따지는 기준이 ▶기존 법질서에 대한 변화 여부 ▶사회적 약자 보호 여부▶기본권 확대 여부 등으로 다양하다”며 “사법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다각적인 판결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법원, 어디로 가나

대법원은 송두율 교수 사건에서 송 교수의 방북 5건을 모두 국가보안법상 탈출로 본 원심을 깼다. 다수 의견은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후의 1건은 무죄”라고 보았고, 소수 의견은 “국적과 관계없이 모두 무죄”라고 맞섰다. 보-혁 대결의 전선이 진보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큰 틀에서 법적 안정성이 흔들릴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법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신선한 개혁 바람이 부는 양상”이라면서 “이 대법원장이 대법관 추천을 통해 보수와 진보의 절묘한 균형점을 잡은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활성화해 법률 쟁점에 뚜렷한 결론을 제시한다는 게 이 대법원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권석천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