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전수자>판소리고법 기능보유 후보 정철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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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뚝 따다닥-뚝 닥.』 단순하면서도 둔탁한 소리지만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드는데는 북만한 악기가 없다.이같은 보편성 때문에어느 때,세계 어느 곳에 가도 북은 있게 마련이고 그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수많은 북 중에서도 특히 판소리 반주용 소리북(일명 고장북)은 전통음악의 장르를 통틀어 단일 악기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때문에 예부터 판소리 북장단을 치는 사람을 고수(鼓手)라 대접해 불렀고 「一 鼓手 二 名唱」혹은 「암고 수 숫명창」이라 하여 고수의 기예를 더 높이 쳐주었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의 장단을 밀고 당기고 맺고 풀면서 때때로 소리꾼과 관객들의 정서흐름에 따라 추임새를 넣어 한바탕 흥의 도가니를 연출해내는 재간꾼이 바로 고수다.그래서 고수는 응당 소리에 통해야 하는 법이고실제 조선 순조때 명고수 송광록(宋光綠).주덕기(朱德基)등은 업을 판소리로 돌려 명창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판소리를 하다 고수로 대성하기는 좀처럼 쉽지않다.그래서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의 기능보유자 후보 정철호(鄭哲鎬.73)선생의 경우는 매우 희귀한 예에 해당된다.
『요즈음 국악을 잘 모르는 이들이 고수를 단순히 판소리꾼의 조역쯤으로 알지만 예전에는 대단했습니다.고수란 소리판을 지휘하는 총감독이랄까 지휘자랄까 하는 그런 역할이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소리꾼들도 제빛을 내기 위해서는 명고수를 찾아 다니곤 했죠.』 명고수인 그가 국악과 인연을 맺기는 사실 판소리창이 먼저였다.전남 해남에서 세습 재인(才人)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난 鄭선생은 어려서부터 이름난 지무네였던 어머니의 굿판을 쫓아 다니며 판소리의 모태인 무가에 젖어 살았다.
9세 이전에 부모를 다 여의고 13세에 할머니마저 돌아가 하늘 아래 고아가 된 그는 이때부터 고달픈 독공의 길로 접어들었다.사숙의 첫 대상은 당시 가장 이름을 떨치던 임방울(林芳蔚)명창이었다.林명창이 목포에서 공연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가 오디션 결과 『목이 좋다』는 평을 들은 그는 이후 4년동안 신평일(申平日).임준옥(林俊玉).장월중선(張月中仙)등과 함께 모든 것을 다바쳐 소리공부를 했다.이어 동편제로 유명한 정응민(鄭應珉)선생밑에서 다시 1년을 공부한 뒤 24세때는 제1회 남원명창대회에 나가 적벽가(赤壁歌)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스승을 비롯,내로라하는 명창들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때부터 장르를 바꾸기로 하고 고법의 달인 한성준(韓成俊)선생을 사사,당시 명고수중의 한 사람으로 날리던 김재선(金在先)선생을 찾아가 1년간 고법을 전수받았다. 워낙 바탕이 좋은데다 훌륭한 스승을 사사한 덕인지 지금까지 그의 북장단을 찾은 명창들은 이루 헤아릴 수없을 정도.
강남준(姜南俊).오수암(吳壽岩).김여란(金如蘭).박초월(朴初月).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박동진(朴東鎭).조상현(趙相鉉).성창순(成昌順).조통달(趙通達).안숙선(安淑仙)등 웬만큼 이름 있는 소리꾼들이 다 망라된다.
아쟁산조의 창시자이기도 한 鄭선생은 판소리 1천여곡과 창극 2백여편을 만드는등 창작부문에서도 독보적 존재다.
李晩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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