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땅속에 남아야 할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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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광복절에 첨탑이 잘리면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기 시작했다.더불어 그 일에 관해 달아올랐던 논의들도 끝났다.그러나 실제적 문제들은 아직 그대로 남았다.가장 큰 문제는 물론 거기 자리잡은 중앙박물관의 문화재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일에 대한 방책이 아직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적 계산 때문에 서둘러 건물을 허는 데서 오는 문화재의 손상은 적지 않을 것이다.우리 사회에서 문화재에 대한 시민들의애착심은 대단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애착심은 실제적 조치들로 구체화되지 않고 어처구니없게 문화재들이 훼손되는 일이 많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심각하지만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문제는 거친 발굴에 의한 유물들의 파손이다.발굴은,경험있는 사람들에 의한 조심스러운 작업이라도 어쩔 수 없이 유적지와 유물을 파손시킨다.우리 나라에선 사정이 특히 나쁘다.호리꾼들에 의한 도굴은말할 것도 없지만 전문가들에 의한 발굴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거친 작업 때문에 소중한 문화재들이 복구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경우들도 드물지 않다.따라서 유적의 발굴은 서두를 일이 아니다.
발굴을 서두르지 말아야 할 까닭은 또 있다.탐사 장비들이 점점 정교해지면서 유적지를 파헤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유적지를 파헤치기 전에 그런 비침투(non invasive)탐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서두르지 말아야 할 또하나의 까닭은 과학과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이전엔 가치가 없다고 버려지던 것들로부터 귀중한 자료들이점점 많이 얻어진다는 사실이다.그래서 요즈음엔 유적지에서 나온나무 둥치가 이내 눈에 띄는 토기 조각보다 오 히려 귀중하게 여겨진다.그 나무 둥치의 나이테로부터 식물연대학자(dendrochronologist)들은 한해 단위의 기상 자료들을 얻어낼수 있는 것이다.더 귀중한 것은 유적지에서 나온 꽃가루들이니 그것들은 기후와 지형의 변화에 관 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면 흥미로운 유적지들을 서둘러 발굴하는 것보다 발전된 장비와 기술을 갖추고 보다 높은 안목에서 유적들을 살필 수있을 뒷날의 고고학자들에게 일거리를 되도록 많이 남기는 것이 옳다.유물들은 대체로 그것이 속하는 곳,즉 땅속 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좋다.백제의 유적들은 온전하게 남은 것들이 드문 세상에 기적적으로 잘 보존된 무령왕릉을 도저히 발굴 작업을 할 수 없는 나쁜 조건속에서 파헤친 일은 70년대 초엽 우리 사회의 거친 풍토를 생각하더라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발굴에 필요한 기술과 자금이 부족하므로 백년 뒤를 기약하고 진시황제의 유적 발굴을 멈췄다는 중국 고고학자들의 얘기는 우리 가슴에 얼마나 아프게 닿는가.
그러나 거친 발굴을 막는 것은 실제론 무척 어렵다.고고학자들에겐 유적지의 발굴이 생업이다.그래서「파지 않으면 죽는다」(dig or perish)가 그들의 구호다.게다가 유적지들엔 재산권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엔 공유지에서 가축들이 너무 많이 사육돼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고 바다에서 물고기들의 씨가 마르는 경우에서 잘 보여주는 것처럼 적정량을 훨씬 넘는 자원의 이용이 나온다.사정이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유적지들은 파헤쳐진 다.이런 상태에선 정부의 감독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관리들은 대학이나 박물관을 감독할 능력도,의욕도 없다.가장 좋은 길은 재산권을 적용하는 것이다.그렇게 하기 어려운 경우엔 부분적으로라도 적용하는 것이 좋다.
당사국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어획량을 규제하는 것은 바로 부분적이나마 재산권을 적용한 예다.
이제는 우리 고고학자들도 유적들을 제한된 자원으로 여겨 발굴을 스스로 규제해야 할 것이다.지금 이 땅엔 세월의 자취가 어린 폐허다운 폐허가 없고 삽질로 아프지 않은 유적지가 드물다.
중앙박물관의 소장 공간이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유적지의 발굴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수행하도록 고고학자들이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보인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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