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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유산을찾아서>25.紺紙金泥 大寶積經 券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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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일본 교토(京都)국립박물관은 신정연휴가 끝난 지난 1월4일부터한달간 『고사경(古寫經)』특별전을 개최했다.
사경은 간단하게 말하면 불교의 경전을 베껴쓴 것이다.그러나 쓰기가 간단치 않은 한자를 잘쓰는 일을 놓고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에서 단순한 의미 이상의 뜻을 부여해온 것처럼 불교에서도 정성스레 경전을 베끼는 일은 바로 부처님 앞에 큰 공덕을 쌓는일로 여겨왔다.
그래서 사경이라고 하면 세속에서 할수 있는 가장 크고 지극한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금물과 은물로 글씨를 쓰고 표장(表裝)도화려함과 장엄을 다하는게 보통이다.
우리가 한점의 사경에서 그 시대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실체나문화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이유로 사경 역시 시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고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게 된다. 교토국립박물관의 사경특별전은 이 지역 출신 변호사였던 모리야 호조(守屋孝藏)가 1954년 사경등 불교전적 2백60여점을 일괄기증한 것을 40년이 지난 뒤 다시 기념하기 위해 열린전시다. 전시품으로는 모리야컬렉션 외에도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출신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20세기초 돈황에서 가져온 희귀본 사경,그리고 고려시대 사경 몇점씩이 포함돼 모두 36점이 선보였다.
불교미술에 대한 연구가 가장 앞서 있다는 일본에서도 사경만 모은 이만한 규모의 전시는 처음이었으며 이 기회를 통해 사경에담긴 미술사적 의미가 새롭게 조명됐다.
이 전시에서 국내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사경은 일본 문화청이 구입해 1983년부터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해온 고려사경 감지금니 『대보적경』 권32 1축이었다.
남아있는 고려사경중 가장 연대가 오랜 이 사경은 그간 존재는알려져 왔지만 일반에 공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미 몇년전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이 사경의 실물조사를 마친 서지학자 천혜봉(千惠鳳)교수는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불경 가운데가장 오래된 변상도(變相圖)가 붙어있는 절품(絶品)』이라며 지금도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최상의 국보급 문화유 산』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이 사경의 가치는 먼저 현재 국내외에 전해지는 수십점의 고려시대 사경들이 대부분 忠자 고려왕 시절에 쓰인 것인데 비해 그보다 거의 2백50~2백60여년이나 앞선 것이라는데 있다.
그러나 이 사경에는 이런 미술사적 가치 외에 일반에도 흥미를끌만한 대목이 있다.바로 사경공덕을 발원한 사람이 고려사 간신열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김치양(金致陽.?~1009)및 그와 사통했던 황보(千秋太后 皇甫)씨인 때문이다.
김치양은 왕후의 외척임을 빌미삼아 궁내를 무시로 출입하면서 목종의 생모이자 경종비였던 헌애왕후 황보씨와 밀통해 사생아를 낳고 왕실을 어지럽혔던 간신이다.
한때 목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황보씨의 총애가 계속되자 김치양은 자신의 사생아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행적은 강조(康兆)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를 없앤 뒤 현종을 추대하는 과정에서 목종까지 죽이게 됐는데 이는 거란이 뒤에 신하로서 왕을 살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침입을 하게 하는 한 빌미가 됐다.고려는 어쨌든 이 침입으로 미증유의 문화 재 손실과훼손을 당하게 됐다.
이 사경은 김치양과 황보씨가 둘 사이에 아들을 낳고 후안무치한 권세를 등등하게 떨치고 있을 때인 1006년 발원해 만든 것이다. 대보적경전이란 대승의 심묘한 법보(法寶)를 집적한 경전이란 의미로 보살수행법에 관한 여러 경전을 한데 모아 편집한것이다. 전체 1백20권중 유일하게 남은 이 32권은 표지에 보상당초문이 그려져 있고 뒤를 이어 세명의 공양주보살이 꽃을 뿌리는 이른바 산화(散花)공덕을 베푸는 변상도가 정교하게 은(銀)으로 그려져 있다.
이 변상도는 고려의 그림솜씨를 여실하게 보여주는데 사방 들꽃이 만발한 가운데 세 보살이 꽃바구니의 꽃을 흩날리는 서정적인모습이 일정한 속도와 같은 굵기를 사용하는 철선묘(鐵線描)로 그려져 있다.
특히 변상도 끝부분에는 붉은 글씨로 이것이 일본에 전해지게 된 경위가 적혀있다.1388년,말하자면 조선이 건국되기 4년전권호헌(權豪憲)이란 율사에 의해 이 사경이 교토근처의 곤고린지(金剛輪寺)에 시주됐다는 내용이다.
***日本 중요문화재로 지정 이어서 16장의 종이를 잇댄 뒤1장에 26행,1행에 17자씩 약8에 걸쳐 대보적경의 내용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사경공덕을 하게 된 경위,즉 사성기(寫成記)가 적혀있는데 거기에는 이 사경의 발원자인 왕태후 황보씨와대중대부상서 김치양,그리고 사경을 쓴 사경생(寫經生) 최성삭(崔成朔)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사경의 글씨체는 북송 전기에 유행한 해서체의 영향이 강하지만한자한자 반듯하고 절도있는 기품을 담고있다.
또 사성기 뒤에는 「간다(神田香巖)」이라 하여 에도시대말기 이 사경의 소장가였던 상인의 붉은 소장인(所藏印)이 찍혀있다.
교토국립박물관의 가나자와(金澤弘)학예과장은 『이 사경은 메이지(明治)말기 사찰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끊기면서 많은 사찰문화재들이 재력있는 사찰로 재취합되거나 흩어지는 과정에서 민간에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개인의 손을 거쳐 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동양사학자로서 글씨에 관심을 가져『중국서도사(中國書道史)』등의 저서를 쓰고 1952년부터 1960년까지 교토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郎.1897~1984)교수와 이 사경간의 인연이다.
***호암갤러리에 대여 전시 간다교수는 1917년 우연히 이사경을 보고 상자뚜껑에 배관기(拜觀記)를 적어 놓았는데 거기에따르면 자신이 본 이 사경이 이미 50~60년전 자기 조부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는 것.
사성기 말미에 찍힌 소장인의 주인공은 에도시대 말기부터 서화를 즐겨 많은 작품을 모았던 간다의 조부 것으로 확인됐지만 그는 언제 이 사경이 간다집안을 떠났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교토박물관에서도 문화청이 이 작품을 구입한 것은 일본의 어느사찰이라고만 말해주고 있다.
이 사경은 1978년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받았다.교토국립박물관은 1994년 첫 공개에 이어 中央日報社와 湖巖미술관이 공동주최한 『대고려국보전』에 이 사경의 특별대여를 허가함으로써 지난 7월15일부터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전시소개되 고 있다.
▧ 다음은 일본 長谷寺소장의 청동향완입니다.
글 :尹哲圭기자 사진:金允澈기자 자문위원: 鄭良謨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安輝濬 서울대박물관 관장 洪潤植 동국대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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