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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산과 바다가 한데 있어 보석과 같은 섬.제주도엔 1년 3백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
산다화(山茶花)와 동백의 겨울부터 유채꽃.왕벚꽃.참꽃이 만발하는 봄,유도화.문주란.자귀.해녀콩.개상사화의 풍성한 여름을 거쳐 가을철의 단풍.억새,그지없이 향기로운 한란(寒蘭)에 이르기까지….
향기로 따진다면 하얀 귤꽃도 뺄 수 없다.향기로운 꽃나무가 많아 싱그러운 과일도 두루 무르녹는 섬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아름다움을 깨달았다.규격의 틀에 갇혀 사는 무의미함에 눈떴다고나 할까.
사랑하지 않는 이와 함께 사는 것.그보다 더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는가.남편과 헤어지리라 싶었다.
러셀은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다 언뜻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사실을 알았다고 했지만 아리영은 외딴 섬에서 선인장꽃을 보고 남편을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사랑은 가뭄 뒤 내린 비에 초목이 살아나듯 우리의 전존재(全存在)를 새로이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의 경험이다.사랑이 없는섹스엔 그것이 전혀 없다.일순간의 쾌락이 끝나면 오직 피로와 역겨움과 허망함이 남을 뿐이다.』 러셀의 말이 새삼 실감났다.
사랑 없는 섹스와도 이제는 결별이다….결심을 하고 서울에 올라왔다.나선생의 쓸쓸한 표정이 그 결심 너머로 가물거렸다.
도시는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마당의 자귀나무는 벌써 길고 파란 콩깍지를 달고 있다.잎새가무성하여 창문이 온통 가려져 햇살이 들지 않을 지경이다.
-가지치기를 해야지.그래,가지치기를! 49재는 조촐했다.
여남은명의 연구실 동료와 몇 안되는 가족 중에 최교수의 외사촌 오빠인 고박사 얼굴도 보였다.아리영의 상담의사(相談醫師)다. 짙은 감장회색 싱글과 하얀 물방울 무늬의 감장 넥타이 차림이 고박사를 한결 젊고 단단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 모실까 하는데….』 재를 마치자 고박사는 아리영에게 다가와 넌지시 청했다.할 얘기가 있다는 말투였다. 아리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박사가 시키는대로 아버지 차 기사더러는 집으로 가라 하고 그의 차에 올랐다.
고박사는 손수 운전하여 달렸다.서울 근교의 지리에 어두운 아리영으로선 어디쯤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한참만에 호숫가에서 멎었다.붉은 지붕의 통나무집 앞이었다.
「장어구이 전문」이라는 간판이 있었으나 통나무집 안은 꽤 넓어 호텔 로비 같았다.호수가 보이는 온돌방으로 안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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