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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한반도 진주과정.사진발굴 의미-日도없는 희귀자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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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6면

소련은 극동지역에서 별다른 어려움없이 일본 관동군을 격파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간주되고 있다.그러나 소련과 일본.미국의 전사(戰史)를 비교해 보면 소련이 고전했던 지역도 있었다.美蘇 모두는 당시 관동군에 대해 과대평가했던 면도 있었 지만 관동군이 그렇게 만만하지 만은 않았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사령관 바실레프스키)산하에는 3개의 방면군이 있었다.만주 서부를 목표로 하는 트랜스아이칼방면군과 북만주로 진공하는 제2극동방면군,동만주가 작전구역인 제1극동방면군이 그것이다.이외에 태평양함대가 주력군으로 추가 될 수 있다.여기서 한반도에 진주한 부대는 제1극동방면군 산하의 제25군이었다. 제1극동군의 초기 작전계획에 의하면 한반도로의 진공은광활한 만주작전의 극히 일부였으며 일본군의 진로를 절단하는 작전에 지나지 않았다.한반도는 2차 목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군은 對일본전쟁 개시 직후 한반도 확보를 위하여 한반도 진공계획을 급히 변경했다.8월10일 메레츠코프 제1극동방면군사령관은 제25군을 강화시키면서 태평양함대와 함께 해안지역으로 진격,북부 한반도의 주요한 항구 청진.원산 등을 확보할것이라는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했다.이러한 임무는 작전 초기단계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결국 소련은 일본의 조기 항복이라는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 힘의 공백지대였던 한반도의 일부지역이라도 육군을 급히 상 륙시켜 자신의 세력권으로만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1945년 8월11일 밤과 12일 새벽 사이에 본격적으로 韓蘇국경을 넘은 소련군은 11일 밤 별다른 전투없이 웅기를 점령했고 12일 아침 나진을 탈환했다.태평양 함대의 육군 전투부대는 13일부터 청진작전에 들어갔다.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비교적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므로 16일 오후2시에야 비로소 청진을 비롯한 항만 전체를 점령할 수 있었다.8월15일 당시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에 밀려 41도선을 넘지 못했다.
25군 산하 제393사단은 소규모의 격렬한 전투 끝에 나남과부령을 각각 17,18일에 차지했다.16일 관동군으로부터 군사행위를 중지할 것을 제의받은 소련극동군은 17일 관동군에게 20일까지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제의했다.결국 1 9일 관동군 사절단이 蘇滿국경 근처 메레츠코프의 본부를 방문했고,20일 전쟁은 끝났다.이 와중에서도 17일과 19일 사이에 소련군 추가병력은 韓蘇국경을 넘었다.
1945년 8월18일 바실레프스키장군은 만주와 한반도의 소련점령예정지역에 조속히 진주할 것을 명령했다.25군은 8월19일길림市에 들어가 20일 밤 이 지역을 해방시켰으며 21일 하얼빈을 점령했다.같은 날 韓中접경도시인 연길을 탈취하자 치스차코프사령관은 21일 연길로 비행했다.그는 연길에서 관동군 제3군사령관 무라카미 중장과 무장해제 교섭을 벌였다.무라카미는 조선에 있는 군인에게 무기 소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으며,치스차코프는 화기는 허락할 수 없으나 대검 소지는 허용한다는 스탈린의 결정을 알려주었다.이번에 발굴된 사진자료들은 당시 제1극동방면군의 2인자며 군사평의회 위원회 스티코프의 사진첩에 나오는내용으로 치스차코프장군에게 거수경례하는 무라카미의 모습이 이채롭다.이 자료는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사진으로 소련측 기록인 『조선의 해방』과 일본측 기록인 『조선종전의 기록』등에 묘사된 내용을 실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치스차코프는이어 연길에서 함흥 주둔 관동군 제34군의 후시부치 사령관을 만 났는데,이 자리에서 그는 북위 38도선 이북지역만이 소련의무장해제 범위라고 처음 알려주었다.
한편 25군 선발대는 24일 평양과 함흥으로 공수되었는데 관동군 34군 사령부의 소재지인 함흥에는 남부 군단 사령관 샤닌이 동행했다.치스차코프 사령관은 8월24일 함흥을 경유,26일평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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