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권력型 지하경제 청산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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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說은 사실이 아니고 카지노 자금이라느니 대통령 측근의 자금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규모도 4천억원이 아니라 1천억원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돈 임자가 누구든,규모가 얼마든 금융실명제 실시 2 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터진 이번 사건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검은 돈의 실재(實在)를 말해주고 있으며,그 규모도 엄청나기 때문이다.소위 지하경제의 커다란 한 부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인 통계에 잡히지 않고 숨어서 움직이는 지하경제는 어느나라에나 있다.밀수.도박.마약밀매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이밖에도 교통 경찰관이 교통 위반자에게 스티커를 발부하는 대신 돈받고 눈감아주는 것에서부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 들의 무자료 거래,인.허가를 따내기 위해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에 이르기까지 지하경제는 여러가지 형태로 움직인다.
한국에서 지하경제의 규모는 국민총생산(GNP)의 10%정도라는 조사결과가 있는가 하면 30%가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하경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산자원의 낭비,소득이나 富의 불공정한 분배를 가져오기 때문이 다.밀수를 예로 들면 당국의 감시를 피해 운반.보관.판매해야 하기 때문에정상적인 수입활동에 비해 훨씬 많은 인력과 장비를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에 투입해야 한다.즉 비생산적인 활동에 자원이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을 안내기 때문에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세금 부담이 커지거나 아니면 세금으로 집행되는 정부 사업이 축소돼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지하경제의 피해는 경제적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도덕성에 있다.대부분의 지하경제활동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다.따라서 지하경제가 번성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한 사회임을 보 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6共시절까지는 권력과 결탁한 또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 지하경제가 번성했다.특히 권력의 핵심에서 소위 정치 비자금(비資金)이라는 명목으로 검은 돈을 긁어 모았다.재벌 기업들이 이권을 얻기 위해 갖다 바치기도 했고,눈총을 받은 후에 마지못해 내기도 한 돈이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율곡사업과 같은 대규모 예산사업에서는 외국기업으로부터의 자금수수도 막대했으리라는 추측이다.
문제는 돈을 주는 측이나 받는 측,그리고 일반 국민도 이러한공공연한 비밀거래를 으레 그런 것이다 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의 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할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사들이 소위 정치를 잘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 으로 지하경제의 우두머리 노릇을 해온 꼴이다.
지하경제를 번성하게 만드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다.지나치게 높은 세율이나 기업활동에 대한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제는 탈세나 뇌물공여의 인센티브를 불러온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돈에 대한 탐욕이다.밀수나 마약밀매는 물론이고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수십억,수백억원의 돈을 받아 치부(致富)하는 것도탐욕 때문이다.
삼풍참사도 근본적으로 백화점 주인과 건설업자.행정관리들의 탐욕이 빚어낸 비극이 아닌가.
이번 사건은 권력형 지하경제를 근절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그러나 5,6共의 정치 비자금에 대한 전면수사가 없이는 근절될 수 없다.금융실명제 실시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권력주변의 검은 돈과 탐욕이 사라져야 한국정치가 진보할 수 있 고 한국경제가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5,6共의 비자금 수사는 국민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리라는 주장을 수용해서는 안된다.
〈西江大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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