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파문-착잡한 청와대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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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석재(徐錫宰)前총무처장관 발언으로 불거진 전직대통령의 4천억원 가.차명계좌 보유설 파장을 지켜보는 청와대의 입장은 착잡하다.뚜렷한 해법도 없고 그렇다고 방치해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사안의 수습을 총리실에 위임한 것이 이런 청와대의 기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지금까지 청와대가 이 정도의 중대사안을 직접 개입하지 않고 총리실에 맡긴 적이 없다.
한 고위관계자는『이쪽(청와대)에 묻지 말고 총리실에 알아보라』고 했다.
청와대는 일단 관망자세를 취하고 있다.자칫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이 사안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수습할 수 없는 파국을몰고올 수도 있다는 판단때문인 듯하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청남대에서 휴가를 보내고 6일 오후 귀경한 뒤 7일 오전 이홍구(李洪九)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徐前장관의 후임인선을 협의,김기재(金杞載)前부산시장을 임명했다.이런 신속한 조치는 徐前장관의 발언파문을 조기차단하 려는 의지로해석된다.문책성 인사일뿐 8월말 내지 9월초로 예정된 당정개편일정과는 별개라는 뜻도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한 金대통령의 언급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체로 사실조사의 원칙에는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가 구체적으로 전직대통령의 계좌를 모두 조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데도 일치한다.구체적인 범죄행위가 드러난 것도아니고 고소.고발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가.차명 계좌를 조사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검찰에서 조사한다 하더라도 徐前장관을 자진출두형식으로 불러 발언의 진위를 들어보는 선에서 끝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현재로서는 徐前장관이『술을 마신 상태에서 시중에 떠도는 얘기를 전했을 뿐』이라고 한다면 뚜렷이 조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徐前장관이『4천억원의 비실명계좌중 절반정도를 헌납하고실명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문의해 보았다는 한이헌(韓利憲)청와대경제수석과 추경석(秋敬錫)국세청장은『전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문제는 법과 일반국민들의 정서사이의 괴리를 메울 수 없다는데있다.법적으로 어떤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전직대통령이 그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그렇다면 국민들 이 흐지부지한조사결과를 과연 수긍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金대통령은 그러나 치적 1호로 꼽는 금융실명제의 취지가 퇴색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고 있다.따라서 비실명 예금의 실명확인기간이 끝나는 13일을 기점으로 비실명계좌를 일제히 검색하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금융감독기관이 자발 적으로 비실명계좌를 조사하거나 조사를 의뢰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연쇄폭발성이 강하고 조사결과에 따라서는 정치권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언제까지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데 청와대의 어려움이 있다.
〈金斗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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