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 친구여, 죽기 전에 몽땅 해보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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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로브 라이너 
주연:잭 니컬슨·
모건 프리먼 
등급:12세 관람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두 할아버지가 병실을 나와 여행길에 오른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일명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조금은 숙연하고, 조금은 비장할 법도 하건만 이게 웬걸, ‘버킷 리스트’는 시종일관 유쾌한 영화다.

속물적인 눈높이에서 비결을 말하자면, 두 할아버지 중 한 사람이 엄청난 부자다. 이들의 여행은 자가용 비행기를 동원해 하루는 이탈리아에서 밥을 먹고, 다음날은 히말라야에 오르는 식이다. 유명 관광지 답사만이 아니다. 스카이 다이빙으로 하늘을 날고, 스포츠카로 경주용 트랙을 달리고, 젊은 애들처럼 문신도 새긴다. 한마디로 꽤 철없는 할아버지들이다.

사려 깊고 차분한 카터(모건 프리먼). TV퀴즈쇼를 척척박사처럼 맞히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지만 사실 대학은 문턱만 밟아봤을 뿐, 평생을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 왔다. 이 가정적인 남자가 아내를 따돌리고 병실에서 처음 만난 남자끼리 여행을 떠나는 것만도 대단한 일탈이다.

반면 백만장자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컬슨)는 주변에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기적인 괴짜다. 이 병원도 자기 소유인데, 그동안 수익을 극대화하느라 2인1실만 운영하는 방침을 고수해 왔다. 병원의 평판을 염려한 비서의 강권으로, 그도 어쩔 수 없이 낯선 환자 카터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에드워드는 카터가 혼자 써 내려가던 소박한 리스트를 훔쳐보고, 자신의 노골적인 리스트와 추진력을 더해 여정을 시작한다.

영화의 핵심은 물론 합성화면처럼 보이는 풍물기행보다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캐릭터가 만나는 재미다. 괴짜-잭 니컬슨, 현자(賢者)-모건 프리먼이라는 익숙한 캐릭터의 새로운 조합은 이 영화의 이런저런 허점을 눈감아 주고 싶게 만든다. 병마와 싸우는 고통이나 죽음을 앞둔 두려움은 이들의 캐릭터 코미디와 초호화 여행에 은근슬쩍 묻혀버린다. 올해로 71세 동갑내기인 두 배우의 관록과 감독 로브 라이너의 연륜으로 봐서 좀 더 심오하고 성찰적인 영화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그 기대를 배신한다. 따지고 들면, 안 될 것도 없다. ‘리치 리치’ 같은 어린이 백만장자의 판타지도 있었던 마당에, 할아버지 백만장자(혹은 그와 친구가 된 할아버지)의 판타지는 대리 만족의 쾌감에 더해 세월이 주는 좀 더 진한 여운까지 맛보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카터는 에드워드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선물한다. 백만장자의 재력이 뒷받침된 호사보다도 가족의 가치가 이 리스트의 상위에 올라야 한다는 얘기다. 상업 영화의 도식으로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건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역시나 두 배우의 풍모 덕분이다.

‘버킷 리스트’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들의 입을 빌려 거꾸로 생의 기쁨을 얘기하는 영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왔던 라틴어 격언 ‘카르페 디엠’, 즉 지금에 충실하게 삶을 즐기는 것이 청소년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참고로 ‘버킷 리스트’의 ‘버킷’은 양동이를 뜻한다. ‘양동이를 걷어차다’(Kick the Bucket)라는 표현이 미국 속어에서 ‘죽는다’를 뜻하는 데서 나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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