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 쓰나미’ 서브프라임보다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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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국제 유가와 원자재·곡물 값이 사상 최고치를 줄줄이 갈아치웠다. 치솟는 유가와 곡물 값은 세계 경제 곳곳에 주름이 지게 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사회 갈등은 폭동으로 번지기도 한다. 반면 치솟는 원자재 값 덕분에 돈방석에 오른 업종도 있다. 국제 상품 값 급등이 지구촌에 희비를 엇갈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9일(현지시간) 뉴욕 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유(WTI)는 사상 최고치인 배럴당 110.87달러에 마감했다. 구리 선물(파운드 당 4달러)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옥수수(5월 인도분)는 전날보다 6달러5센트(2.3%) 올라 올 들어서만 15번째 사상 최고를 경신했다. 쌀 가격도 8일 최고가를 다시 갈아치웠다.

◇폭동 직전 식량 수입국=쌀과 밀 가격은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멕시코에서 예멘에 이르는 33개 국가에서 곡물가 급등으로 인해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벌써 폭동이 일어난 나라도 있다. AP통신은 9일 카리브해의 빈국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수만 명의 빈민이 대통령궁을 에워싸고 르네 프레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폭력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카메룬에서는 2월부터 시작된 식량 폭동으로 40여 명이 숨졌다.

아시아 국가들도 심상찮다. 필리핀 정부는 경찰에 쌀 사재기를 한 사람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또 극빈층에게 배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도 돼지고기와 쌀값 폭등이 제2의 천안문 사태로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미국 칼럼리스트 윌리엄 페섹은 최근 블룸버그 통신 칼럼을 통해 “금융위기보다 곡물가 폭등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쓰러지는 저가 항공사=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기름값 급등으로) 홍콩의 저가 항공사인 오아시스 항공(OHKA)이 9일 갑자기 파산해 수천 명의 승객이 홍콩과 런던·밴쿠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고 전했다.

미국에선 최근 열흘간 알로하 항공과 ATA항공, 스카이버스 항공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연료비 부담이 커지자 박리다매를 추구해 온 저가 항공사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아시아 항공우주포럼의 마틴 크레이그 회장은 “항공산업은 극도로 불확실한 산업이 됐다”며 “제트 연료 가격과 신용 경색 등 항공사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외적 요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용론 나오는 바이오 연료=바이오 연료도 곡물 값 급등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옥수수나 밀·쌀 대신 바이오 연료용 사탕수수 같은 작물을 심는 경작지가 늘면서 곡물 공급 부족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이오 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0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영국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최근 주요 8개국인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에게 편지를 보내 “바이오 연료 장려 정책이 전 지구적인 곡물 부족과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곡물로 연료를 만드는 것이 타당한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 하루 빨리 연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EU)은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2020년까지 수송 부문 바이오 연료 사용 비율을 10%로 확대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경작지 늘리는 미국 농부들=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다. 곡물 값 급등은 미국 농부들에게 놀리던 땅에 다시 씨를 뿌리도록 했다. 미국은 1985년부터 환경보전을 위해 농사를 짓지 않고 놀리면 1에이커(4047㎡)당 51달러를 보상해 주는 휴경보전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지난해 여름 휴경지는 3680만 에이커(약 1489억㎡)에 달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40여만 명의 농부는 18억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놀리는 것보다 농사짓는 게 수익이 훨씬 커진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미국 농부들은 200만 에이커의 휴경지를 되찾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NYT는 최근 “다시 농사가 시작된 땅이 델라웨어와 로드아일랜드 땅을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한 규모”라고 전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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