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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한국戰 참전老兵의 감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노병(老兵)은 벽화를 연신 쓰다듬었다.눈자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휠체어를 미는 딸인 듯한 중년부인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동상(銅像)곁에 가만히 사진틀을 기대어 놓는 부부도 있다.흑백사진 속에는 20세를 갓넘었을 것같은 젊은 병사가 벙커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 27일 일반에 공개된 미국 워싱턴 한국전참전용사 기념공원은 방문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낡은 군모에 빛바랜 제복,가슴과 어깨에 훈장과 견장을 가득 단 모습들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판초 우의(雨衣)를 입은 비장한 표정의 동상들 앞에는 사진과꽃들이 놓여있다.흰 종이에 깨알같이 글씨가 쓰인 편지도 보였다.삼각형의 기념공원 앞쪽에 자리한 추모의 연못에는 던져놓은 동전들이 불과 수일 사이에 바닥을 덮었다.어느 목 발의 노병은 기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마치 봇물 쏟듯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40년만에 처음 소속감을 느낀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참전기념행사를 다루는 美언론의 관심도 의외라고 느껴질 만큼 대단하다.연일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잊혀졌던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테네시州에서 이 행사를 보고 싶다며 말기 암의 병든 몸을 끌고왔던 라일리 링커스(66)前육군하사가 29일 버지니아의 한 병원에서 운명한 소식을 전하며『그의 마지막 전투가 비로소 끝났다』고 애달픈 사연을 전했다.
한국전에서 희생된 미국인은 공식통계로 사망 5만4천2백46명에 실종자가 8천7백여명이다.그러나 40여년이 지난 현재 어떤형태로든 한국전과 관련된「사연」을 가진 사람은 2백여만명은 될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잊혀졌을 것으로 여겨지던 한국전이 미국인들에게 이처럼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또 이들이 한국전을 자유수호를 위한 성전(聖戰)이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우리를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이 면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못벗어나 여전히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한국전은 미국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깊게 받아들여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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