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이탈리아 관객들 한국인 테너에게 “브라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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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지난 3일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연출 그레이엄 비크). 3막까지만 해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관객들이 4막에서 스코틀랜드 귀족 막두프 역으로 출연한 테너 이정원(39)이 추방당한 망명자들이 황량한 들판에 쓰러져 있는 가운데 혼자 무대에 등장해 4분 동안 아리아 ‘오 내 아이들아…아 아버지의 손을’를 부르자 일제히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맥베스에게 온 가족이 몰살 당한 다음 비참한 심경을 토로하는 노래다. 이정원은 풍부한 성량과 초점이 정확한 발성, 매끄러운 고음 처리, 호소력 짙은 해석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한국인 테너로는 처음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 주역 가수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라 스칼라에서는 오페라 공연 도중 좀처럼 박수를 치지 않는다. 리카르도 무티가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굳어진 전통이다. 음악의 흐름을 끊어 놓는다는 이유에서다. 지휘자는 박수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곡을 연주한다. 멋 모르고 극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박수를 쳐도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다.

라 스칼라에서 공연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맨꼭대기 6층에 포진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한 오페라팬들이다. 로지오니스티(loggionisti)라고 불리는 이들은 가장 값싼 갤러리석(loggione)에 앉아있지만 귀는 가장 고급스럽고 까다롭다. 오페라 가수의 생명을 하루 아침에 끊어 놓을 수도 있는 ‘저승사자’들이다. 1막에서 박수가 터지자 6층에서 “쉿”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 다음부터 내내 잠잠했던 오페라팬들도 테너 이정원이 부른 아리아에서는 “브라보”를 외치면서 박수를 쳐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한번 터진 박수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맥베스 부인 역만 수십번 했다는 소프라노 파올레타 마로쿠도 4막에서 “우”하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테너 이정원은 야유를 받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인데 ‘브라보’까지 터졌다.

공연이 끝난 후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이정원씨의 표정도 무척 밝았다. “관객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리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객석에서 ‘브라보’라고 외치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이탈리아 극장의 텃세로 겪었던 마음 고생이 한순간 싹 달아나더군요.”

전속가수를 따로 두지 않는 라 스칼라는 작품마다 까다로운 오디션으로 유명하다. 오디션을 통과해 출연 계약서에 서명해도 공연 며칠을 앞두고 가수를 교체할 정도로 콧대가 높다. 지난해 5월 스칼라 극장의 오디션에 통과한 이씨는 원래 푸치니의 ‘3부작’중 ‘외투’에 출연하기로 돼 있었으나 추가 오디션에서 베르디의 ‘맥베스’중 막두프 역을 제의받았다. 연습 과정에서 이탈리아인 음악 코치가 발음을 문제 삼으면서 계속 꼬투리를 잡기도 했다. ‘맥베스’는 베르디의‘리골레토’‘시몬 보카네그라’‘팔슈타프’처럼 바리톤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 막두프는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처럼 맥베스 다음으로 비중이 큰 배역이다. 이씨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는 11일과 18일 두 차례 ‘맥베스’에 추가로 출연할 예정이다.

이정원은 1993년 플로토우의 ‘마르타’로 프랑스 리옹 국립 오페라에서 데뷔했다. 98년 프랑코 코렐리 국제 성악 콩쿠르, 99년 베르비에 성악 콩쿠르, 2000년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와 티토 스키파 콩쿠르에서 차례로 우승했다. 국내에서는 2005년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주역을 맡았다. 오는 5월 10일 고양 아람누리 1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드레아 로스트와 함께 무대에 서고, 7월 아비뇽 ‘노르마’ 공연에 이어 9월 부산문화회관 개관 20주년 기념 오페라 ‘아이다’, 10월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의‘토스카’,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투란도트’에도 출연한다.


밀라노=글ㆍ사진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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