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기쁨<56>와인을 즐기는 또 다른 비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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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35면

프랑스 부르고뉴의 고급 와인 산지로 꼽히는 샹베르텡 마을 포도밭.

와인은 정말 미스터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블라인딩 테이스팅에서 생산 국가와 연도를 맞히는 것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게임과 다름없다. 꼭 블라인딩이 아니어도 글라스를 빛에 비춰 와인의 색깔을 살피거나 향기를 맡으며 맛을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와인이 지닌 다층적이며 심오한 세계관이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수께끼 풀이를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요즘 나는 ‘와인 생산자 알아맞히기’ 게임에 빠져 있다. 지난 회에서 다룬 네고시앙(와인 중개상)은 도메인(생산자)으로부터 포도를 사거나 와인을 오크통째 구입해 자사 라벨을 붙여 판매한다. 이 네고시앙의 와인이 과연 어느 도메인의 포도로 만든 것인가, 혹은 어떤 도메인의 와인을 통째로 구입한 것인가를 추리하는 재미가 참으로 쏠쏠하다.

최근 르모아스네 네고시앙의 특급 와인 ‘샹베르텡 클로 드 베즈’ 1996년산을 마셨다. 혀에 닿는 감촉이 비단처럼 매끄럽고 응축된 과일의 단맛과 초콜릿 아로마가 근사한 이 와인은 어질어질할 정도로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두말할 나위 없는 일품이었다. 나는 이 우아하고 완성도 높은 클로 드 베즈는 어쩌면 샹베르텡 마을의 일류 생산자 아르망 루소가 만든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봤다. 르모아스네가 가끔 루소의 와인을 오크통으로 구입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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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이 와인을 루소가 만들었을 거라고 추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루소의 특급 포도밭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심은 고목(古木)으로 1ha당 25~35헥토리터(hL)라는 적은 양의 포도를 수확한다. 루소 와인의 독특한 매력인 과일의 뛰어난 응축감은 이 적은 수확량에서 오는데, 르모아스네의 1996년산 클로 드 베즈에서도 이와 같은 뛰어난 응축감이 확실히 느껴졌다.

일류 생산자의 와인을 판매했지만 현재는 미국의 투자가 그룹에 넘어간 네고시앙 카미유 지로의 와인도 ‘수수께끼 풀이’로 안성맞춤이다. 지로는 콩트 라퐁, 메오 카뮤제 등 초일류 생산자의 와인을 통째로 구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거래하는 생산자 중에는 ‘와인의 신’ 앙리 자이에의 이름도 있었다.

지로의 ‘본 로마네 프리미에 크뤼 레 보몽’ 1988년산을 남동생과 함께 열어 봤다. 마개를 딴 순간 화사하고 달콤한 향기가 확 피어올랐다. “굉장한 와인이야”라고 몹시 흥분하는 남동생. 한 모금 마셔 본 우리는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상하고 우아한 단맛, 멍하니 넋을 잃을 정도로 길고 복잡한 여운. 둘이 동시에 “앙리 자이에”라고 외쳤다.

지로의 레 보몽 1988년산을 만든 이가 정말로 ‘와인의 신’ 앙리 자이에인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진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신은 하늘의 부름을 받은 뒤고, 지로 역시 와인 사업에서 손을 뗀 탓이다. 단지 앙리 자이에나 루소의 와인이라고 생각하며 마시면 맛있는 와인이 한결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그 또한 수수께끼 풀이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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