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게임’은 계속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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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28면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달 28일 일본 최대 메모리 반도체업체 엘피다의 사카모토 유키오(坂本幸雄) 사장은 “4월부터 D램 반도체 가격을 20%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1일엔 세계 2위 메모리업체인 하이닉스반도체가 낸드플래시 반도체 생산 물량을 줄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 폭락 사태로 지난해 내내 고전했던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경쟁을 자제하겠다는 선언이 잇따라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격랑에 빠진 반도체 업계 … 삼성전자의 대응은

하지만 세계 1위 메모리업체인 삼성전자는 아직 느긋한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하이닉스가 감산 계획을 발표한 이틀 뒤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은 “업계의 물량 축소 움직임으로 D램 전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수요가 강한 제품은 자연스럽게 가격이 올라가지 않겠느냐”면서도 “낸드플래시 감산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급 물량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는 지난해부터 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벌여온 ‘치킨게임(chicken game)’에서 삼성전자가 승기를 확실히 잡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게임에선 마주 보고 차를 돌진하다 핸들을 먼저 꺾는 사람이 진다. 상대가 먼저 생산을 줄이길 바라며 가격 하락에도 아랑곳 않고 양산 경쟁을 벌여 왔던 업체들이 삼성전자 앞에서 슬슬 꼬리를 내리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키움닷컴증권의 김성인 상무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더 이상 물량 경쟁을 벌일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온 것”이라고 풀이했다.
 
D램 시장 전망은 낙관적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은 지난달 7일 반도체 가격과 관련, “1분기가 바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사의 반도체 애널리스트들도 D램 가격은 이미 바닥을 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 같은 낙관론은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더 이상 출혈경쟁을 지속할 힘이 없다는 분석에서 비롯된다. 즉 수익성 회복을 위해 생산물량을 줄이고 가격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란 이야기다.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계속 폭락하면서 삼성전자를 뺀 나머지 업체들은 모두 적자를 보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 43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때 삼성과 함께 흑자를 냈던 일본의 낸드플래시업체 도시바(1500억원)도 올 1분기 적자로 돌아선 게 확실시된다.

이 회사가 2007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결산을앞둔 지난달 19일 반도체사업 부문의 연간 영업이익 예상치를 종전보다 43% 낮춘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익 예상치를 낮춘 데 대해 도시바 측은 지난해 4월부터 올 3월까지의 낸드플래시 가격 하락 폭이 6개월 전 예상했던 40%보다 높은 50%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업 손실과 함께 전문가들이 눈여겨보는 것은 올해 설비투자 규모다. 설비투자는 곧 공급 물량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2003년 이후 지난해까지 D램 설비투자는 연평균 37.2%씩 증가했다. 이 바람에 지난해 D램 가격이 폭락했다. <그래픽 참조>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확 바뀌었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는 올해 세계 D램 부문 설비투자가 지난해에 비해 37%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하이닉스를 비롯해 난야·파워칩·프로모스 등 대만 반도체 3사와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등 세계 D램 업체 대부분이 올해 설비투자를 지난해보다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동부증권 이민희 애널리스트는 “D램 업체의 설비투자 축소가 하반기부터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기대감은 벌써 시장에 반영되고 있다.

세계 4위 메모리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은 2일(현지시간) 대규모 적자를 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오히려 6.3% 뛰었다. 이 회사는 이날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7억72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냈다고 밝혔다. 전년 동기보다 적자 폭이 22배 커진 것이다. 그런데도 주가가 폭등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출혈경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낸드플래시는 지켜봐야
D램에 대한 전망이 낙관적인 것과 달리 낸드플래시에 대한 전망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 세계 1위 낸드플래시 업체인 삼성전자가 감산 행렬에 동참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황 사장은 3일 “낸드플래시 공급 물량을 조절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세계 2위 낸드플래시 업체인 일본 도시바가 미국 샌디스크와 공동으로 1조7000억 엔(약 16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점도 부담이다. 이에 따라 올해 낸드플래시 시설투자 규모는 지난해보다 8% 증가할 것으로 아이서플라이는 내다봤다. 2003년 이후 연평균 47%씩 설비투자가 늘어온 데 비하면 증가세가 크게 둔화된 것이다. 하지만 D램의 올해 설비투자 증가율(마이너스 37%)을 감안하면 아직도 높은 수준이다.

결국 물량 공급 경쟁이 계속돼 가격 반등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이 낸드플래시 감산에 나서지 않는 것은 물량 경쟁을 통해 후발업체를 확실히 따돌리겠다는 포석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업체로선 유일하게 흑자 행진을 해온 삼성이 후발 업체인 도시바의 추격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론 삼성의 최신 낸드플래시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어 감산할 필요가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부증권 이 애널리스트는 “6월께 나올 미 애플의 아이폰에는 16Gb(기가비트) 낸드플래시가 탑재되는데 현재 이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은 삼성과 도시바뿐”이라며 “이달부터 삼성의 애플 공급 물량이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대만큼 안 느는 수요
2006년 12월 삼성전자 황 사장은 자신만만했다. 당시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은 극심한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반도체 산업의 전통적인 산업 사이클에서 빠져나왔다”고 밝혔다. 휴대전화와 MP3플레이어, PC 및 가전제품 등에서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불과 몇 개월 못 가 깨졌다. 삼성의 독무대였던 주문형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일본 엘피다와 독일의 키몬다가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하이닉스가 기존 설비로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성공해 D램 시장은 순식간에 공급과잉 상태에 돌입했다. D램 수요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던 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새로운 PC 운영체제 ‘윈도 비스타’가 기대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도 D램 시장 상황을 악화시켰다.

1990년대만 해도 PC의 새로운 운영체제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이른바 ‘킬러 애플리케이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러나 기존 컴퓨터 사양에 만족하는 경향이 농후해지면서 새 운영체제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나와도 이전처럼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지 않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가전제품에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는 점이다.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를 이을 차세대 저장장치인 블루레이엔 512MB(메가바이트)짜리 D램이 들어간다. 고급형 제품은 1GB(기가바이트) 용량의 D램을 탑재한다. 거의 노트북컴퓨터만큼 D램을 사용하는 셈이다. 또 풀(Full) HD TV에도 256MB D램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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