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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개방·3000 뛰어 넘는 평화 구상 내놔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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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12면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왼쪽)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4일 남북 관계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3000 구상’을 넘어 한반도 평화정착 전략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동연 기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순항하던 남북 관계가 이명박 정부 출범과 더불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10년 만의 보수 정권 탄생이 낳은 조정 국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북한의 대응은 예상보다 강하다. 그동안 관망하던 북한은 왜 강경 자세로 돌아섰을까. 남북 관계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북한은 남한을 제쳐두고 대미 관계 개선 쪽으로 나갈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4일 만나 최근의 남북 정세를 짚어보고 정책 대안을 모색했다.

정세현 前 통일부 장관-김영희 대기자 남북관계 대담

▶김영희=북한은 한나라당 경선, 대선 기간에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비난을 비켜 갔습니다. 이 후보에 대한 기대와 배려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4월 1일 노동신문은 논평원의 이름으로 이 대통령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모욕에 가까운 용어로 비난했어요. 새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반영한 게 아닌가 합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포기가 우리의 대북 지원을 포함한 남북 관계 진전의 전제 조건임을 분명히 했어요. 달라고 손만 내밀면 두말 없이 주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길들여진 북한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 대통령이 남북 기본합의서가 남북관계 개선의 기본 틀이라고 강조하면서 남북 정상 간 6·15 공동선언(2000년)과 10·4 공동선언(2007년)을 무시해버린 것도 북한엔 감내하기 어려운 사태였을 것 같아요. 거기다 통일부 장관도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개성공단 2단계 사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의 북한의 핵공격 대책 발언이 나온 거죠. 북한은 김 의장의 발언을 에누리없이 북한 핵 시설에 대한 선제 공격으로 인식한 것 같아요. 이 발언은 북한에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 준 꼴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핵 불능화와 신고가 막바지의 중대한 시점에 와 있는 지금, 북한이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예감이 안 좋은데요.

▶정세현=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은 실용주의를 강조해온 이명박 대통령을 기업인 출신으로 분류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허물어졌다고 판단했겠지요. 북한의 3개 신문이 신년 공동사설에서 한나라당 ‘한’자도, 이명박 ‘이’자도 쓰지 않고 6·15, 10·4 공동선언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한 것은 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통일부 장관의 발언이 나오고 6·15, 10·4 공동선언이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빠지면서 반발로 돌아섰다고 봐야죠.

북한의 국내 정치에서 강경 기류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원인일 수 있어요.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해 말부터 대남 사업 일선에 있던 사람들의 활동이 뜸해졌어요. 이들과 정책을 조정하는 사람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 같습니다.

북한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식 개혁·개방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누적돼 왔습니다. 내부적으로 보수 회귀 현상이 나타나면서 검열이 강화되다 보니 북한 내 대화론자들의 입지가 현저히 약화됐다고 봅니다. 남한과의 긴장을 조성해 미국의 대북 유연 노선을 끌어내려는 고도의 심리전 내지는 한·미 이간 전략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북한이 노동신문 논평원의 대남 비난 글까지 냈는데 마지막 단계를 의도적으로 남겨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가장 권위 있는 노동신문 사설을 통한 비난입니다. 군사적 대응을 위협하는 발언까지 나왔는데 북한이 단기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봅니까.

▶정=최근 북한은 북방한계선(NLL)을 유령선이라고 했어요. 이 시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 해군 함정이 자기들 영해를 침범했다고도 주장합니다. 우리가 반격하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한 뒤 우리가 먼저 공격해서 자기들이 정당방위했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어요.

베이징 올림픽이 8월에 있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의 체면을 봐서 세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이 상황을 말리도록 하기 위해 오히려 강하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김=북한이 남한에 강경한 도발적인 자세를 취해 미국의 대북 자세를 유연하게 유도하겠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오산입니다. 미국의 자세가 지금처럼 유연할 때 비핵화에 관한 6자회담 합의를 이행해 북한이 갈망하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 교역법의 대북 적용 종료를 받아낼 생각을 해야죠.

남북 관계가 냉각된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이 핵 불능화와 신고 문제에서 타협점을 찾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한·미 간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94년 제네바 핵합의가 성사됐을 당시의 한·미 갈등이 재연되지는 않을까요.

▶정=그것이 가장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그동안 남·북·미 관계에서 남북 관계가 앞서가면 미국은 매우 불편해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핵 문제 해결이 남북 관계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을 때 미국은 여러 가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견제도 했어요. 반면 남북 관계가 정체됐을 때 북·미 관계는 성큼 나아갔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의 북·미 제네바 합의가 대표적인 예지요. 우리 쪽이 잘못해 끼지도 못한 측면도 있지만 우리를 제쳐두고 북한과 미국이 함께 걸어간 것이죠. 미국의 대북 정책을 잘 읽지 못하고 ‘비핵·개방·3000 구상’(북한이 비핵화하고 개방을 하면 북한 주민 1인당 소득이 10년 안에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는 새 정부의 공약)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미국은 우리를 의식하지 않고 대북 협상에서 속도를 내면서 핵 문제 해결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주도로 해결되면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문제도 미국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 체제가 정착된다고 해도 현상유지 내지는 분단 고착화로 갈 우려도 있지요.

▶김=핵 문제가 북·미 협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6자회담에서 한국의 역할과 한·미 간 정책 조율을 통해 한국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이 형식적으론 6자회담의 진전, 실질적으론 북·미 간 협상의 진전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용주의적인 대북정책의 내용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대북 지원과 남북 대화를 6자회담 틀 안에서 합의된 비핵화 프로세스를 촉진하는 방향에 맞추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핵 문제 프로세스가 고비를 넘기면 다음은 북한과 관련 당사국의 관계 개선입니다. 그런 큰 그림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구상이 나와야 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작성됐어야 했어요.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일종의 정치 수사에 사로잡혀 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홍보 논리에 스스로 포로가 되면 정책 입안을 못합니다.

▶김=싱가포르에서 예정된 북·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 핵 신고 문제의 돌파구가 찾아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구도를 바꿔야 해요. 지금까지 이 대통령과 외교·안보 라인 고위 관리들이 쏟아낸 대북 발언으로는 북·미 간의 타결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겁니다. 이명박 정부에 비핵·개방·3000이라는 정책 말고는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정책이 아직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이 대통령이 비핵·개방·3000 구상을 그렇게 강하게 오랫동안 이야기한 만큼 취소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그대로 놔두고, 우선 남북 간에 체제를 인정·존중하는 토대에서 한반도에 평화를 어떻게 정착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해 대통령 수준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북쪽의 강경 추세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당국 차원의 비공개 접촉을 통해 당국 회담을 복원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담 격을 총리급으로 올려놓아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이나 차관 차원의 회담으로 원상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10·4 공동선언에도 비핵·개방·3000의 실현을 위해 채택할 구상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6·15, 10·4 공동선언이 이 대통령이 중요하다고 말한 남북 기본합의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이들 세 가지를 묶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이 들어간 두 선언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련이 보통 큰 게 아닌 듯합니다.

▶정=북한이 6·15, 10·4 공동선언에 왜 그토록 집착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봐야 합니다. 7·4 공동성명이나 기본합의서는 북한 입장에서는 옛날 문건입니다. 국제 정세의 격변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잠정적으로 위기 극복을 위해 정치적인 계산하에서 합의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역사적 효과를 다했다고 보고 있을 겁니다.

국제 정세가 변화한 상황에서 남북관계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정상끼리 만든 게 6·15, 10·4 공동선언입니다. 북한에는 현재의 지도자인 김정일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문건이 중요합니다. 두 선언에 대한 북한 당국의 중요도 부여나 북한의 국내 정치적 의미를 다시 분석해 새로운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김=이 대통령이 이달부터 시작하는 4강 정상회담 시리즈에서 새 정부의 대북 정책 국제화 내지 국제적인 조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정책을 국제적인 문맥에서 점검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어요.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활용할 방안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도 이 대통령이 가질 정상회담 시리즈까지 고려해서 대남 대응을 조절할 걸로 봅니다. 강경 쪽으로 갈지 강경 자세 완화로 갈지는 북한 지도부 나름의 계산에 달렸습니다. 어느 쪽이 될지 예측은 어렵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사일방어(MD)를 논의한다면 북한에 또 하나의 빌미를 줄 겁니다.

▶정=좋은 말씀입니다. 평화는 남북 간에도 있지만, 국제적인 지원과 협조 속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차제에 비핵·개방·3000 구상보다 한 차원 높은 평화 구상, 국제화된 평화 구상을 내놓고 북쪽과 가슴을 연 대화를 하자고 하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비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을 기다릴 것입니다.

▶김=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꽃게철, 베이징 올림픽을 활용할 유혹을 받겠지만 결코 수지맞는 장사가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요.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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