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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역사 칼럼]고려와 조선이 타협한 장례 문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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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39면

상가(喪家)에 다녀왔다. 상복(喪服)으로 남자들은 검은색 양복을, 여자들은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상복을 입게 된 걸까. 1970년대 ‘가정의례준칙’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검은 양복과 흰 치마저고리는 서양과 동양의 타협이자 이중성으로 보인다. 이중성은 또 있다.

통상 빈소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엄숙하다. 그런데 빈소를 나와 음식이 차려져 있는 곳으로 가면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술이 있고, 떠들썩하기까지 하다. 이 묘한 이중성은 또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조선 초기, 한창 사회 분위기를 쇄신할 때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 “상(喪)을 당한 집이 무가(巫家)에 가 귀신에게 흠향(歆饗)하거나 장례 날에 술을 마련하는 자가 있으면 서울은 사헌부에서, 지방은 감사·수령이 엄히 금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주인과 손님 모두를 죄주어야 합니다.” 이런 논의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근래에 지방 사람들이 부모 장례 날에 인근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술 마시고 노래하며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으니 풍속에 해가 됨이 심합니다”라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얘기대로라면 이 시절 장례는 엄숙·우울 모드가 아니다.

조선은 이런 습속이 고려에서 온 것이며 비루한 풍속이라고 했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어떻게 장례를 치렀다는 말인가. 고려 왕실은 유교적으로 했다. 관직자에게도 유교식 상복을 입게 하고 상기(喪期)를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민간 풍속은 달랐다. 불교나 무당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다’는 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겁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술 마시고 노래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명랑함마저 느껴진다.

조선은 물론 유교적 상례를 원했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몹시 애통한 것이다. 너무 슬픔에 겨워 옷을 제대로 차려입을 수 없을 지경이어서 너덜너덜한 참최(斬衰·상복 중 가장 중한 것)를 입는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관계가 멀수록 슬픔은 덜하고 상복은 단정해진다. 조선에서 상례란 명백히 흉례(凶禮)였다.

그렇다면 이제 조선에서 이전 장례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공식 의례에서는 사라진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이면으로 스며들었다. 빈소 밖의 명랑함처럼. 고려와 조선의 타협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상가의 이중성은 여기에 연원이 있어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고려 것과 조선 것이 섞여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틈틈이 확인시켜준다. 엄숙함과 명랑함은 타협을 했고, 그것은 우리 속 유전인자로 함께 존재한다. ‘가정의례준칙’의 강제성이 사라져버린 지금 장례문화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검은색 양복과 흰색 치마저고리는 앞으로도 계속 입게 될까? 우리 속의 유전인자들은 어떤 타협을 하고, 또 어떤 유형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