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44.실전주의자 서봉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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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조치훈은 한국기사들에겐 언제나 「거인」이었다.한국바둑이 국제무대에서 아직 올챙이였던 시절,조치훈은 일본을 휩쓸어버렸다.
한국바둑의 씻을 수 없는 「일본콤플렉스」,그걸 산산조각낸 조치훈,그리하여 국내 매스컴을 뒤덮으며 화려하게 금의환향했던 조치훈.이 모든 영상들이 「조치훈=강자」라는 이미지를 한국프로들의 뇌리에 각인시켜 놓았다.
서봉수는 특히 조치훈의 찬미자였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趙9단의 한마디에 서봉수는 전율과 감동을 동시에 느끼곤했다.
그는 독특했다.현대바둑에 화점혁명을 몰고온 우주류의 다케미야(武宮正樹)9단을 우습게 보고,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미학(美學)의 대명사 오타케(大竹英雄)9단을 시시하게 여겼다.
그들은 한낱 낭만주의에 젖은 멋쟁이일뿐 진정한 프로는 아니라고 믿었다.그렇다면 진정한 프로는 누구냐.바로 목숨을 걸고 둔다는 승부사 조치훈이고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조훈현이며종반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있는 이창호라고 단언 했다.
이런 논리에는 프로라면 대체로 수긍한다.그러나 서봉수는 특별히 극단적이었다.
본인이 오직 실전 속에서 바둑을 연마해 온 실전주의자였기에 뼈저린 근성을 지닌자만이 승부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기에 서봉수는 상대에 따라 자신감과 두려움의편차가 극단을 달렸다.
서봉수가 자신감을 가졌을 때 그의 바둑엔 야전사령관 다운 체취가 물씬 풍겼다.두려움에 빠졌을 때는 마음으로부터 36계를 놓는 바람에 이게 서봉수바둑인가 싶을 정도로 졸국을 두곤했다.
조치훈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서봉수는 두려움과 승리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방황했다.그는 5대1,6대1의 내기도 받아줬다.무슨 얘기냐하면 趙9단과의 대결에서 자기가 지면 동료들이 건 돈은 자신이 갖는다.자기가 이기면 5배 또는 6배로 올려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이길 확률을 5대1이하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92년 11월23일 대만의 타이베이(臺北).이날의 첫판에서 徐9단은 전면승부를 피하다가 무너졌다.
그 옛날 조치훈이 일본의 명인이 되어 귀국했을 때 서봉수는 바둑수에 대한 몇가지 의문을 풀고 싶었으나 그를 감히 만날 수조차 없었다.서봉수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 제3자를 통해 질문서를 전해야했다.그 거인을 마주대하자 徐9단은 겁이 났다.
이날 그는 타이베이의 밤거리를 헤맸다.처참해져서 너는 누구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했다.질때 지더라도 기보라도 훌륭해야하지 않느냐고 통렬히 꾸짖었다.
실전주의자 서봉수가 이때 「기보」에 눈을 돌린건 기적이었다.
그의 철학은 내용이고 뭐고 이겨야했다.승자만이 강자였다.패배한뒤의 「내용」은 휴지조각이었다.
그런데 이날 격심한 복통에 시달리면서 그는 『지더라도 멋있게지자』는 결론에 도달했다.우습게 여겨온 멋쟁이들의 생각에 난생처음으로 공감했다.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11월25일의 제2국에서 徐9단은 극적인 1집승.마음을 비우자 신기하게도 승리가 찾아왔다.목숨을 걸고 두는 것과 마음을 비우고 두는 것.그것은 두려움을 초극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한 얘기였다.
서봉수는 실전의 대가답게 최악의 궁지에 몰리자 깨달음을 얻었다. 결승티켓이 달린 27일의 제3국은 徐9단의 일생에서 최고의 명국이었다.서울에서 검토하던 동료들은 『서봉수가 신들린 것같다』고 말했다.그만큼 훌륭한 한판이었다.
서봉수는 승리한 뒤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환희를 맛봤다.조훈현처럼 세계대회에서 우승해보고 싶었으므로 결승진출은 비할바 없이 기뻤다.마음속에 거인으로 버티고 있던 조치훈을 꺾었다는 사실은 승부가 나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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