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yle] “스타일이란 재밌고 파괴하고 창조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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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홍콩 스타페리 선착장 주차장에 마련된 샤넬의 '모바일 아트' 전시장에서 검정 선글라스를 낀 칼 라거펠트가 인터뷰하고 있다. 라거펠트 오른쪽 둘째가 강승민 본지 기자. [사진=샤넬 제공]

# 라거펠트에게 말을 건다는 것

현대 패션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칼 라거펠트(75).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의 수석디자이너인 그는 2년쯤 전부터 언론과 따로 만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측근들은 “이유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를 모시는 주변 사람 누구도 그에게 “왜 인터뷰를 하지 않나요”라고 물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지난달 12일 홍콩의 ‘샤넬 모바일 아트’ 전시장에 나타난 그와의 인터뷰는 ‘취재 권한’만 얻은 채 진행됐다. 취재 권한이란 라거펠트가 공식 석상에 나타났을 때 그에게 다가가 말 걸 수 있는 접근 권한이다. 전 세계에서 수백명의 기자가 모였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자는 서른 명 남짓. 우리나라에선 중앙일보 기자만 접근권을 허락 받았다.

홍콩 스타페리 선착장의 주차장 옥상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은발을 뒤로 묶은 ‘꽁지 머리’, 짙은 검정 선글라스 차림. 취재진과 세계 각국에서 초대된 샤넬의 VIP 고객 모두 술렁였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취재진이 따라 붙었다. 여느 할리우드 톱스타 못지 않았다. 그가 언제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며 자리를 뜰 지 모르는 취재진은 모두 조바심을 냈다. 쇄도하는 방송용 카메라 사이에서 불어·독어·영어가 난무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경호원들은 다가서는 기자들을 자꾸 밀쳐냈다. 어렵사리 질문 기회를 얻은 기자들은 각국 언어로 질문을 쏟아냈다. 언어를 바꿔가며 쉴새 없이 대답하는 라거펠트 사이에 본지 기자도 ‘전투적’이지만 ‘예의바르게’ 끼어 들어야만 했다.

인파를 뚫고 가까스로 그에게 다가갔다. “무슈 라거펠트!”를 외쳤고 네번 째 만에 그와 얼굴을 마주쳤다. 재빨리 말했다.

“나도 여기 작품들을 봤는데, 작가들이 당신과 샤넬, 그리고 명품을 무작정 숭배하는 여자들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불쾌하지 않았어요? 원래 재미 있는 걸 즐기나요?”

각국의 저명한 현대미술 작가 20명의 작품이 전시된 ‘모바일 아트’에 대한 물음이었다. 2월 27일 홍콩에서 개막된 샤넬의 ‘모바일 아트’(본지 3월 6일자 20면) 전에서 작가들은 1955년 가브리엘 샤넬이 세상에 내놓은 퀼팅백(체인과 마름모꼴 누빔 패턴이 특징)을 소재로 제각각 감성을 풀어냈다. 스위스 작가 실비 플러리는 총을 든 여성이 끊임없이 값비싼 샤넬백을 명중시켜 박살내는 영상을 거대한 샤넬백 안에 담아내기도 했다. 전시는 3년 전부터 기획됐고 그의 지휘하에 작업이 진행됐지만 그는 이날 처음 작품을 둘러보았다.

# “날 조롱해도 좋다. 재미만 있다면”

“음…일부…그런 작품들도 있더라고요. 재미? 물론이죠. 따분한 것은 질색이에요. 어휴. 재미없는 것,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유머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지나치게 매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란 정말 따분한 족속이죠.”

일흔다섯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의력을 뽐내는 그의 남다름은 ‘재미난 것이 좋다’는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미국 상원의원 같은 연설…그런 방식은 사양할래요. 난 그런 것을 싫어해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모든 것을 금지하려는 연설을 싫어하죠. 왜 그래야 하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은 참….”

재빨리 질문을 이어 나갔다. “왜 하필 ‘모바일’이죠?”

“우리가 움직이잖아요. 지구도 돌고 세상도 움직이고 우린 늘 움직이며 살아요.”

# “스타일은 금세 만들어지지 않는다”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않았다면 무성의한 대답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심각한 것은 싫다”고 했다. 심각하지 않은 그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결국 사람도 움직이고 작품도 움직인다. ‘모바일 아트’는 전시관 자체가 세계 여러 도시를 순회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심지어 작품 감상도 한 자리에서 하지 않는다. 헤드셋을 끼고 작품 설명을 들으며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전체 작품을 감상하도록 돼 있다. “라거펠트를 독점하지 말라”는 주위 기자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그래도 내친 김에 더 물었다. “스타일이란 뭘까요? 라거펠트 스타일이란?”

“샤넬의 패션은 20년대, 30년대를 거치면서 본질적으로 각각 다른 것이었어요. 우리가 ‘샤넬 스타일’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다양한 것들의 혼합체예요. 변화는 스타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난 디자인할 때, 오래 남을 수 있고 사라지지 않을 스타일을 만들고 싶어서 기존 스타일을 파괴하죠. 코코 샤넬 역시 그렇게 해서 역설적이지만 새로운 관습, 스타일을 만들어 냈어요. 스타일은 끝이 없지만 언제든 질릴 수 있는 것이고 또 너무 과장하면 가치가 떨어지죠. 결국 스타일은 지금 이 시대에서 당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개하고 육성한 다음 일반인들과 만날 수 있게 할 때만 생겨요.”

홍콩=강승민 기자



칼 라거펠트는 누구
독서광·사진작가 … 40㎏ 감량
뛰어난 재능만큼 튀는 행동도

칼 라거펠트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투피스. 올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패션쇼에 선보였다<사진左>.
올 봄·여름용으로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샤넬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 한쪽 어깨를 드러낸 주름이 많이 잡힌 드레스가 우아하다<사진右>.

칼 라거펠트는 100㎏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날씬하다. 2003년 13개월에 걸쳐 몸무게를 40㎏ 넘게 줄였기 때문이다. 7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온 그가 왜 갑자기 살을 빼게 됐을까. 감량 후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이유를 설명했다. “문득, 다른 옷이 입고 싶어졌어요. 에디 슬리먼이 디자인한 옷이요.”

에디 슬리먼은 디올 옴므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슬리먼이 만든 옷은 아주 마른 남자들을 위한 수트였다. 라거펠트는 “(슬리먼의) 그 옷은 아주 아주 마른 남자를 위한 것이어서 내 나이엔 입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옷에 몸을 맞췄다’. 이 일화는 라거펠트가 얼마나 자신의 스타일에 관한 원칙이 확실한지 보여준다. 감량 후 지금까지 그는 삶은 생선 종류만 즐겨 먹는다.

칼 라거펠트를 부르는 별칭은 많지만 가장 많이 통용되는 것은 ‘패션의 제왕’이란 것이다. 그가 디자인 책임을 맡은 명품 브랜드가 무려 4개나 되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 ‘여성들의 꿈’으로 불리는 샤넬의 후계자가 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올해는 그가 샤넬을 맡은 지 25주년 되는 해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는 65년 시작해 44년째 의상과 액세서리를 디자인하고 있다. 또 다른 명품 클로에는 64년부터 40년간 맡았다가 3년 전 스텔라 매카트니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의 이름을 건 ‘라거펠트 갤러리’도 물론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다.

19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독어와 불어, 영어 모두 자유롭게 구사한다. 유복한 집안 출신인 그는 8살 때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영어를 배워 모두 마스터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그는 이탈리아어와 네덜란드어에도 능통하다. 패션 디자인에 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라거펠트는 22살 때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발맹의 조수로 일하며 패션에 입문했다.

라거펠트는 또 독서광이기도 하다. 파리, 로마, 베를린, 브르타뉴, 함부르크, 몬테카를로 등 6곳에 대저택을 소유한 그는 소장하고 있는 책만 23만권에 이른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도 즐긴다. 단순한 취미 차원이 아니라 그는 어엿한 ‘사진작가’다. 샤넬의 공식적인 자료에 글도 쓰고 자신이 찍은 사진도 자료에 넣는다.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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