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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아동 성폭력 ‘무방비 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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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에 대한 경찰의 조기 대응 실패가 전 국민을 분노로 들끓게 하고 있다. 혜진이와 예슬이의 죽음으로도 모자라 연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인면수심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은 간담이 서늘하다. 경찰에 검거된 용의자 이모(41)씨는 미성년자 상습강간죄로 10년간 복역한 것도 모자라 출소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성도착적 습벽을 계속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천인공노케 하는 것은 그의 태연한 행동이다. 그는 챙 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폐쇄회로(CC)TV 앞에서 뻔뻔하게 아이를 마구 폭행하고 끌고 나갔다. 아래층 주민에게 발각되자, 이씨는 한 층을 올라가 범행을 저질렀던 바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동을 대상으로 극도의 포악함을 보여주었고 추후 성폭행 등이 예견될 만한 징후가 있었음에도 이 사건은 ‘단순 폭행’ 정도로 간과됐다. 경찰의 수사의지 부재로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사건에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아이의 부모와 언론이었다. 결국 대통령이 나서자 4시간30분 만에 범인을 검거하게 되었다. 만일 대통령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만일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혀를 찰 노릇이다.

범인의 여유는 그 사람이 정신장애가 있거나 알코올중독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사회의 아동 성추행에 대한 무방비 체제에서 유래한다. 절도나 강도 사건보다 더 경미하게 취급받고, 제정신이 아니거나 만취한 부랑자의 취기 정도로만 취급받는 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피해 아동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부모들의 마음은 숯덩이처럼 타들어가는 것이다.

일산 사건으로 경찰은 국민으로부터 심하게 질타당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진 데에는 경찰만 잘못한 것이 아니다. 현재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 사건은 약 20% 정도만 기소돼 유죄를 확정받는다. 대부분의 사건은 아동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 하여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사건화도 되지 못하거나 사건화되더라도 용의자가 무혐의 처분을 받고 있다.

많은 경우 가해자들은 피해자나 피해자의 부모를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협박하거나 돈을 주고 합의하자고 시도한다. 이 같은 가해자의 협박과 회유로부터 국가는 피해자를 특별히 보호하지 않는다. 20%도 채 되지 않는 유죄 확정 사건들의 일반적 구금기간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다. 물론 동종 전과가 있으며 성추행을 넘어 강간이 인정된 사건의 경우에는 형기가 조금 더 길다. 하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사건은 성기 삽입 이외에 변태적 성추행을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강간보다는 추행 정도로만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도 아동추행범이라 하여 죄질에 따른 처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일반 수감자들과 동등한 처우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기에 이들에게 심리치료 등을 강제하는 것은 수용자에 대한 인권침해적 소지가 많다. 결국 이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출소한다. 출소한 이후 신상공개를 하고는 있으나 강남 주민의 인적사항을 일산에 사는 사람들이 알 길은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름 아닌 범행을 일삼는 가해 당사자들이 이같이 허술한 사법체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씨의 경우에도 일산에 있는 CCTV 정도로는 강남에 사는 자신을 검거하기 힘들다는 것을 예견했으며, 검거되더라도 범행을 부인하거나 만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기면 별다른 처벌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성폭행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무시한 눈빛에 기분이 나빠서 몇 대 쥐어박은 것이라고 주장하면 가중처벌이 되지 않는 점도 알고 있었다.

범죄를 반복하는 자는 영악해진다. 무력한 아동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는 자는 더욱이 사법체제의 허술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대책이 시급하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