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이 만난 사람 임채정 국회의장] 인터뷰 제3막-<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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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분한 영광 누렸다는 판단에 겸허하게 불출마 결정
■ 대북송금특검은 안 하는 게 나았는데 여론에 밀려 불가피
■ 민주화 성공의 힘 경제로 연결할 신체제 구축 못해
■ 전직 대통령, 자신의 자산 기반으로 활동 계속해야
■ 한국의 진보, 국민의 삶 발전시켜줄 새 틀 짜야 재기한다

요즘 썩 유쾌하지 못할 것 같은 임채정 국회의장. 현재 남아있는 전 정권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직으로, 오는 5월 임기를 만료하게 된다. 지난 2월 정계은퇴까지 선언한 마당에 거칠 것 없을 것 같은 그의 심경.


월간중앙

인터뷰 제3막
-한국정치 왜 이 모양인가?

194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임채정 의장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1975년 동투사건으로 거리로 내몰린 이후 민주투사로 변모했다. ‘평민연’을 중심으로 재야활동을 하던 그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평민당으로 출마해 서울 노원을에서 당선되면서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을 거치면서 내리 4선을 기록한 그는 당의 기획통·정책통으로 1997년 정권교체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정책위 의장 두 번과 노무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이어 국회의장까지, 화려한 정치경력을 밟아온 그에게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따져봤다.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이 더딘 이유가 정치의 중심이 의회보다 정당이 되다 보니 국회의원 개개인의 자질보다 보스에 대한 충성심이 중시돼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내각책임제인 유럽형은 대개 정당 중심이거든요. 우리와 같은 대통령제인 미국은 의회가 굉장히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유럽형으로 가면서 한편으로는 미국형을 또 받아들이고 있다 보니 갈팡질팡하는 형국이 보이는데, 사실 우리의 태생은 정당중심적이에요. 그런데 그 정당중심적이라는 것이 계파 공천 문제와 연결되고, 당직자 문제와 연결되고 부정적 측면으로 전개되는 것이 문제이지요.”

-대통령중심제이지만 의원내각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의원내각제적 성격도 있어요.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워요. 이제 당원협의회를 만들고, 지역경선·당원경선 이런 것들을 통해 보스 중심을 탈피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가 정치 한 지 얼마 안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0년이 됐지만, 정치를 시작한 것은 이제 한 10여 년밖에 안 된다는 말이에요. 좋게 봤을 때 15년 정도 되나?”

-YS 때부터 정치다운 정치가 시작됐다고 보시네요?
“그렇게 봐요. 한 15년 전부터 지금의 정치가 시작된 거예요. 그렇다 보니 한국사회의 정치문화라는 것이 별로 형성된 것이 없어요. 그러니 여전히 실험적인 것이 많고, 혼재돼 있고, 그런 데서 오는 부작용이 굉장히 심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요.”

“한국 드라마·영화에서 국회의원은 부정 이미지 일색”

-국민의 눈에는 온통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가득한데요.
“일정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한국정치가 비교적 빨리 발전하고 있다고 봐요. 지금 국회가 밖에서 보는 것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의원들의 질도 높아졌을 뿐 아니라 일하는 태도나 범위도 굉장히 확대되고, 태도가 발전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정치가 발전하고 있음에도 밖에서 볼 때는 여전히 한국 국회라고 하면 싫은 직종, 저 아래에 있는 순위라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시하면서도 권력을 열망하잖아요?
“굉장히 열망해요. 그래서 지금 길 가는 사람에게 국회의원 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 되고 싶다고 할 정도라는 말이지요.”(웃음)

-왜 정치가가 그렇게 바람직한 이미지를 갖지 못하게 됐다고 보세요?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국회의원을 긍정적으로 다룬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통계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미국의 의원들은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긍정과 부정이 절반 정도로 그려진다고 해요. 물론 문학이나 드라마에서 정치인을 좋게 다루면 이야기가 잘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한국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으로 다루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규정하고 들어가면 한국정치가 좋아질 수 없다는 거예요. 늘 그러면 한국의 국회의원은 항상 나쁜 사람으로만 역할을 하지, 좋은 역할이 있을 수 없잖아요? 좋은 정치가 국민 앞에 제시될 턱이 없잖아요? 만날 나쁜 생각 속에 남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매스컴의 영향이 커요. 너무 그렇게 나가면 결과적으로는 한국정치와 한국인의 관계에서 한국인의 불행으로 남는 겁니다.”

-어떤 것이 긍정적 모습인가요?
“지금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이라든가 정책이 좋은 것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데요? 이번 17대 국회만 해도 행정부에서 내는 법안보다 국회의원 발의 법안이 한 6배 가량 많아요. 물론 일부 법안은 좀 문제도 있지만, 그것이 다 우리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법안들이거든요. 굉장히 좋은 법안이 많고, 좋은 활동을 많이 해요. 물론 그 중에서 몇 사람이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전체 의원을 도매금으로 매도할 일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에요. 한국 국회의원들이 다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 나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고요. 나는 좋은 것은 좋고,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매스컴의 역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이 말씀을 여쭤 보지 않을 수 없네요. 전직 기자로서 전 정권 말기의 기자실 통폐합 문제를 어떻게 보셨나요?
“기자실 문제는 하도 논란이 됐던 정책이었으니…. 기자들한테서는 반대가 많더군요. 기자들에게 선진국에서는 그렇게 다 하는데 왜 그렇게 반대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찬성할 수만은 없다는 이유를 말하더군요. 그것이 그렇게 언론사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대목인 모양이더라고요. 그런가 보다 하고만 있었고, 단지 그러면 정부에서는 왜 그런 식으로 나왔느냐? 정부도 기자들이 미워서 그냥 한번 그렇게 해봤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중에서 절충점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은 해 봤어요.”

-기자실 통폐합이 전적으로 옳은 조치는 아니었던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방법이라든가 내용에서 기자사회의 합의나 동의는 몰라도 이해조차 구할 수 없었다면 제도의 실시에 문제가 좀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정부 구성에서 ‘코드 판단’은 불가피하다”

-우리나라 정당은 수명이 너무 짧은데,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 정당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를 좀 더 오래 해야지요. 절대시간이 짧았어요.”

-너무 정치인을 위한 변명만 하시지 마시고요. 내부의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고요. 영국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해서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우리는 건국 후 60년 동안 건국 과정이 있었지, 전쟁 치렀지, 그 뒤에 군사정권 있었지…. 정치가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 정치라는 것이 대화와 타협이 있어야만 균형이 생기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 정치라는 것이 길게 보면 불과 15년 됐어요. 그렇지 않으면 10년이라고요. 그전에는 투쟁기간이었다는 말이에요. 거기에다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것은 계속 억압하기 때문에 힘이 정당하게 결집될 수 없는 것 아니냐고요?”

-결국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지금 국회의 입법 기능이 굉장히 강화되고 있거든요. 그 동안 국회가 말하자면 행정부의 들러리, 즉 민주주의의 액세서리 비슷한 것이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국회의 입법 기능이 강화되고 있고 입법조사처도 만들고 예산정책처도 만들고, 그렇게 하면서 입법부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굉장히 발전하고 있어요. 의원들의 활동 수준도 높아지고, 또 조직선거라고 해서 만날 뒤에서 형님, 동생 하며 술 먹고 밥 먹고 하면서 표 주고받던 상황도 넘어서고 있어요. 빨리 뭔가 이루지 못한다고 야단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야단쳐서만 되는 것은 아니에요. 북돋워줄 것은 북돋우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면서 함께 가는 아량도 필요하고 여유도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당명만 자꾸 바꾸면서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역사적 조건이라든가 지역감정이라든가 또는 무슨 공작이라든가 이런 것에 의해 분열될 수밖에 없어요. 크게 보면 그 분열된 세력을 모아 가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동안 생각이 달랐던 것들, 서로 파편화됐던 것들이 이제는 한쪽은 보수 쪽이고 한쪽은 조금 진보 쪽이라고 그럴까, 그렇게 해서 모이고 있는 과정이라고요. 그 동안은 흩어질 수밖에 없는 여러 요인이 있었던 것인데 실험도 거치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그래서….”

-그러니까 당명을 바꾸는 것 자체가 아직 정치실험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인가요?
“실험이라기보다 한국적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꼭 옳지는 않지만 그런 불가피한 과정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안 그랬으면 더욱 좋겠고, 그래서 나는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런 파편화한 세력을 전부 결집시키는 데는 이해관계가 다르고 하니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한 현상은 옳지 않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본질로 보고 그것만 야단치고 할 일은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두세 다리 건너면 다 대통령을 알 정도로 연결돼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식으로 얽힌 학연·지연이 우리나라 정치문화에 패악을 끼치고 있지요?
“패악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아까도 말했지요. 진정한 정책대결이 이뤄지지 않는다, 진정한 인물 중심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기준이 흔들린다…. 그것이 모두 지연·학연이라는 ‘연’의 사회가 갖는 폐해지요.”

-현 정권에서도 문제가 된 코드인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책적으로 경쟁하는 선거문화가 성숙하고, 각 당의 정체성이 강화될수록 코드인사는 확대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봐요. 정책과 이념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정부 구성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단지 ‘감성 코드’나 ‘연고 코드’로 인사를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미국 정치인들도 자기 사단으로 정치를 하는데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던데요. 왜 우리나라는 그럴까요?
“미국의 경우는 이를테면 부시의 텍사스 사단이다, 클린턴의 아칸소 사단이다 하는 것들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사람이 자기가 가장 믿고 잘 이해하는 사람과 그룹을 짓는, 틀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것을 보고 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 밑에 다른 최고 스태프들을 짜고 나머지 기능적인 일을 담당하는 행정부라든가 각 자리는 모두 시스템에 의해 임명하고 운영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미국의 대통령들이 하는 그런 권력 그룹, 핵심 그룹 구성을 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것은 동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말하는 연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을 말하거든요. 말하자면 같은 가치를 가지고 나가는 동지가 아니라 사적 인연에 치중하는 거지요.”

“국민의 삶과 연관된 진보 가치 찾아야”

-경제성장이 화두로 등장하면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지금 굉장히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진보세력으로 정치를 시작하신 입장에서 우리나라 제도권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도 진보를 자처했습니다만, 도식적이라고 할까? 관념적 진보는 더 이상 안 되고 이제는 실용적 진보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발전을 또는 성장을 제대로 할 수 없게끔 여러 가지 억압이 심했지요. 그렇다 보니 다 분산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조금씩 변형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을 오래 거치다 보니 우리 진보가 자기 발전을 위한 침착한 노력보다 좀 많이 관념화됐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 국민 속에서 진보가 무엇이냐, 우리 국민의 삶을 발전시켜줄 진보가 무엇이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냐, 이런 데 대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래서 그것을 굳이 ‘실용적 진보’다 이렇게 한번 붙여보는데, 이제는 이념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진보적 가치들을 필요한 부분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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