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12> 독립투사들이 직접 엮은 ‘항일 대장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호 13면

사료(史料)는 당대에 쓰인 1차 사료와 이를 바탕으로 서술한 2차 사료로 나뉜다. 필자가 독립운동사에 관한 1차 사료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대학원에 갓 진학했을 때였다. 의아했던 것은 대부분의 1차 사료가 일제 측의 기록이라는 점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조선치안상황』이나 일제의 수사·재판기록 등이었다. 일제 측 자료가 1차 사료가 되다 보니 일제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사를 바라보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편찬한 1차 사료를 기본으로 삼고 일제 측 자료를 보조자료로 사용해야 하겠지만 해방 이후 굴절된 한국현대사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독립운동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1965년 편찬한 『한국독립사』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독립사』

『한국독립사』는 사연을 간직한 책이다. 이 책은 주편자(主編者) 김승학 선생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승학은 서문에서 “내가 일찍이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 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할 때 백암 박은식 동지가 편저(編著)한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 번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김승학은 21년부터 24년까지 상해 독립신문의 사장이었는데, 이때 주필 박은식의 『한국통사』 집필을 도우면서 해방 후 『한국독립사』를 편찬하겠다는 구상을 세웠던 것이다. 김승학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조직인 참의부 총사령관인 참의장을 역임한 독립군 맹장이기도 했다. 그는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우는 한편 『한국독립사』 편찬을 위한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는 29년 말께 체포되는데 책 서문에서 “왜경에게 체포된 후 수각(手脚·팔다리)이 절골(折骨)되는 수십 차례 악형(惡刑)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고 쓴 대로 이 사료를 보존하기 위해 팔다리가 부러지는 악형을 이겨냈던 것이다.

『한국독립사』 김승학 편저, 1965, 독립문화사

김승학의 짧은 자서전인 『망명객 행적록(行蹟錄)』은 예순 다섯의 나이로 해방을 맞은 그가 고향 신의주에서 독립운동사편찬회를 조직하고 『한국독립사』 편찬 준비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해방 정국은 그를 건국의 현장으로 끌어냈다. 김구의 권유로 광복군 제2지대를 창설했다가 해산당하기도 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그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가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다시 편찬에 나섰다. 신백우·홍주·이학수 등 여러 독립운동가가 도왔는데, 이승만 정부 시절 경찰의 방해로 사무실을 옮기는 등의 고초 끝에 64년 『한국독립사』를 탈고했다. 김승학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편찬위원회는 수십 부를 시험 간행해 생존 독립운동가와 학계 인사들에게 배포해 의견을 물었고, 그 의견을 보충해 65년 『한국독립사』를 간행했다. 크게 ‘국내전쟁’ ‘임시정부’ ‘해외운동’ ‘의열사(義烈士) 및 독립운동자 약전(略傳)’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편찬했으면서도 주관이 개재되기보다 사료로써 말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김승학은 서문에서 “일제 항복 후 이 사료를 40년래 나의 혈한(血汗)의 결정으로 삼아 귀국하였다. 붓이 이에 이르매 백암(白巖) 동지의 추억이 새로워 눈물이 지면을 적신다”라고 박은식이 시작한 작업이 그에게 와서 완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길고 유장한 역사를 지닌 책이 『한국독립사』다. 지금은 서점에서 책을 구할 수 없어 국회·대학도서관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