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술의 예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호 03면

일요일자 신문을 내고 나면 월요일쯤 이러쿵저러쿵 실린 글을 품평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1년 내 ‘윤광준의 생활명품 이야기’를 즐겨 읽었다는 한 애독자는 며칠 전, 그중 으뜸은 ‘장수막걸리’ 편이었다며 “좋은 술을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구절에 꽂혀 오랜만에 통음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읽은 이 손이 저절로 막걸리 병을 잡게 했다는 점에서 윤광준씨의 글 솜씨는 한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옛 선배 가운데 이 분야에 탁월한 이가 있었으니 수탑(須塔) 심연섭(1923~77) 선생입니다. 대한민국 제1호 칼럼니스트를 자임했던 수탑은 또한 30여 년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술을 마신 이력으로 ‘국주(國酒)’를 자칭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수탑이 남긴 『건배』(중앙m&b)는 지금 읽어도 입맛 다셔지는 맛깔스러운 칼럼 모음인데요, 잘 먹고 마시는 일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그야말로 요즘 우리가 흔히 떠드는 ‘웰빙 바람’의 진정한 실천가가 아니었을까 싶은 거지요.

『건배』에 실린 글 가운데 무릎을 치게 만든 명구 하나가 떠오릅니다. “난 마셔요, 그럼요. 난 살았거든요. 안 마시는 분들도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죽어간답니다.” 우리가 흔히 ‘봄바람이 부니까’ ‘추위를 떨쳐버리기 위해’ ‘식욕을 돋우려고’ 같이 궁색하게 붙이는 이유에 비하면 참으로 명쾌하고도 철학적인 음주론이라 하겠습니다.

한 스님이 곡차를 앞에 놓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술을 마시는 일은 일종의 정화(淨化)다. 세상의 독을 누그러뜨리는.” 이 정도면 인간으로 태어나 술 한잔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하겠지요.

미술사학자인 최완수 선생이 지인의 등을 뚜드리며 깨우쳐주신 한마디도 잊을 수 없습니다. 숙취에 괴로워하던 제자 한 명이 “이놈의 술 탓에 못 살겠습니다” 하니 이렇게 지그시 눌러주시더군요. “이봐, 평생 우리 모두를 그토록 공평히 즐겁게 해준 술을 모독하지 말게나.” ‘술의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경지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요.

그래서 송강(松江) 정철(1536~93) 선생은 읊으셨나봅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