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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으면 아프지도 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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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16면

식코
감독 마이클 무어
러닝타임 123분
개봉예정 4월 3일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또한 유일하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은 산업화된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 국민 대다수는 민영보험에 의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미국은 국민 1인당 의료보험 비용 지출이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국민이 5000만 명에 이르며, 개인 파산 중 50%가 의료비용 때문에 발생하는 나라다(파산 신청자의 4분의 3은 의료보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면서도, 매년 1만8000명이 보험이 없어 죽어가는 나라.

‘화씨 9/11’로 이라크 전쟁 강행의 이면에 있는 부시 정권의 거짓과 기만을 통렬하게 꼬집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번에는 이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의료 현실에 대해 일전을 불사하고 나섰다.

‘식코(sicko)’에서 우리는 전작들을 통해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는 마이클 무어의 유쾌하고 통쾌한 ‘수다(내레이션)’와 ‘수사(재편집과 패러디)’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하지만 미국 의료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한 그의 전략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치밀해 보인다.

그는 이 기획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그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 모집한 갖가지 ‘의료 괴담’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식코’가 내리는 진단과 처방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모든 문제는 ‘이윤 극대화’를 지상목표로 하는 민간 의료보험 회사들의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폐지(abolished)’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당연한 명제가 미국에서는 좀처럼 쉽게 실현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식코’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유포하고 있는 ‘붉은 악몽(레드 콤플렉스)’에서 찾는다. 미국은 여러 차례 사회보험 제도의 도입을 시도했지만, 사회보험을 의료 사회화로 보는 의료계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다. 가장 최근의 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시도했던 의료개혁 추진과 좌절의 경험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하고자 했던 의료개혁은 의사협회를 비롯한 이익집단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사회보험의 도입을 ‘관료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계획’으로 몰아붙이는 보수 정객들의 선동 때문에 좌절했다. ‘식코’의 신중한 설득 전략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며, 대다수 미국인의 마음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는 그 ‘붉은 악몽’을 겨냥하고 있다.

‘식코’가 보여주는 다양한 ‘의료 괴담’은 정말 어처구니없다.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스스로 상처를 꿰매고 있는 환자, 제한된 의료 보장 범위 때문에 잘린 두 손가락 중 하나만 봉합하게 된 환자, 너무 말랐거나 너무 뚱뚱해 보험 가입을 거부당한 소년과 소녀, 직장이 있어야 무료 약을 탈 수 있기 때문에 7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을 하는 노인.

보험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터무니없는 구실 때문에 보험급여 지불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된 수많은 환자와, 그 구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냄으로써 보험회사로부터 대가를 받았던 많은 사람(승인 거부 실적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받는 ‘의학 고문’과 꼬투리를 찾아내는 ‘청부업자’)의 뒤늦은 양심고백.

기막힌 미국의 의료 현실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불법 원정 치료’를 받기 위해 무료 의료가 보장되는 캐나다로 가는 한 환자의 뒤를 따라 해외로 나간다. 캐나다·영국·프랑스로의 그 긴 여정의 목적은 분명하다. 모두 사회적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들이지만, 미국 보수 정치인들의 선동(형편없는 ‘국유화된 약’과 기나긴 ‘대기시간’)과 달리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의료 선진국들의 현실과 마주칠 때마다 ‘바보’처럼 놀라는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낸다. 미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퍼포먼스의 절정은 미국에서 제대로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911 구조대원 3명을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로 데려가 무상 치료를 받게 하는 마지막 여행이다(관타나모 해군기지 앞에서의 선상 시위가 잘 보여주듯, 그 미국 국민 자존심 건드리기는 분명 ‘미국 중심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며, 그래서 불편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기막힌 미국 의료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분노를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안적인 다른 나라의 경험을 보여줌으로써 계몽하고자 하는(또는 자존심을 자극하고자 하는) ‘식코’의 전략이 과연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의료제도 개선을 위해 나서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냉전 종식 이후 유일한 패권국가가 된 미국 안에 가장 농도 짙은 냉전의 유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고, 그런 한 미국의 의료제도 개선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민을 위해서나, 전 세계 시민을 위해서나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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