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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초등학교, 그 후 두 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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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미초등학교는 폐광촌인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예미1리에 있다. 전교생은 60명. 사설 학원도 없고 학습지 교사도 너무 멀고 외지라 찾지않는 곳이다. 이 학교가 두 달 전인 1월 26일 서울의 전경련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3회 대한민국 학생 영어 말하기 대회를 휩쓸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대상(1명)과 최고상(4명)을 산골 아이들이 따낸 것이다.

비결은 공기업인 지역난방공사의 지원이었다. 예미초교와 지역난방공사는 재작년 ‘인재 양성 지원사업’ 운영협약을 맺었다. 난방공사 직원들은 ‘예미 수호천사단’을 만들어 영어·컴퓨터 교육에 나섰다. 개인용 컴퓨터와 백과사전·과학교재를 마련해 주었다. 매주 화·목요일 방과 후엔 공사가 위촉한 원어민 영어교사가 학교에 찾아와 가르쳤다. 방학 때는 영어캠프에서 합숙을 했다. 자연히 실력이 쑥쑥 늘었다. 지난해 서울 YMCA가 주최한 어린이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도 2명이 입상했다. 무엇보다 “영어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도시 아이에게 주눅들지 않게 된 것”(안연미 예미초교 교무부장)이 가장 큰 성과였다.

2월 15일 예미초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 6학년생 17명이 후배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학교를 떠났다. 그런데 졸업식을 전후해 산골마을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졸업생의 절반이 넘는 9명이 정선군 아닌 외지의 중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17명 중 8명은 인근 영월군의 중학교로, 1명은 큰 도시인 원주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8명(남학생 2명, 여학생 6명)만 정선군 내 남자·여자 중학교를 각각 택했다.

9명의 부모가 주소지를 옮기면서까지 아이를 외지로 진학시킨 것은 더 큰 학교에서 더 잘하는 아이들과 경쟁하며 다니길 원했기 때문이라 한다. 정선에 남은 아이들이 다닐 중학교는 한 학년이 한 학급뿐이다. 반면 영월의 중학교는 학년당 네 학급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 사람 눈에는 영월이나 정선이나 똑같은 강원도 산골이겠지만 당사자들은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다 결정한 일이었다. 영월의 중학교도 반색하며 아이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급식비 면제 같은 혜택을 제공하면서.

낙심한 곳은 정선군이다. 애써 길러낸 우수한 학생들이 외지로 훌훌 떠나버렸으니 당연하다. 정선군에서는 지난해 80여 명, 올해는 48명의 중학교 졸업생이 외지 고등학교로 빠져나갔다. 게다가 정선이나 영월 모두 인구 감소를 막느라 비상이 걸린 상태다. 정선군 인구는 4만1000여 명. 인구가 4만 명 밑으로 떨어지면 행정조직도 축소되므로 군에서는 주민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형편이다. 영월군은 지난달 15일 현재 인구가 4만74명으로 집계돼 그야말로 초비상이다. 그래서 ‘인구 증가 조례’까지 만들어 군내에 전입해 오는 학생에게 기숙사비와 주택 마련 보조금을 지원하고 귀농 가구에는 영농정착금과 차량번호판 교체비도 준다. 물론 정선군도 회심의 대책을 마련했다. ‘교육과 세상’이라는 공교육 지원 업체와 계약해 이번 주말 군내 중·고교생에게 온·오프라인 통합교육 무료 서비스를 시작한다. 바꿔 말하면 “서울 강남 수준의 사교육을 공짜로 시켜줄 테니 계속 군내에 머물러 달라”는 호소인 셈이다.

정선군과 영월군의 예미초교 졸업생 쟁탈전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새삼 일깨워준다. 산골 아이들도 잘만 가르쳐 놓으면 여기저기서 다투어 손을 내민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여건이 훨씬 좋은 서울·부산·광주의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어디에 살든 고르게 교육받게끔 여건을 만들어 줄 의무가 있다. 교육에서의 기회 균등이다. 도시와 시골, 잘사는 집과 못사는 집에 상관없이 모든 어린이가 예미초교 수준의 교육 혜택을 누리도록 할 수는 없을까. 전국에 수백 개의 예미초교가 생겨 영어 말하기 대회·수학 경시대회를 주름잡고 졸업생은 인근 중학교들이 서로 모셔가려 다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