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요한의나!리모델링] ‘미룸의 제왕’ K씨의 습관 탈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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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K씨(35)는 스스로를 미룸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미룸과 벼락치기로 이어진 삶을 살아왔다. 숙제, 시험, 업무 등 닥치지 않으면 좀처럼 시작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아파서 병원 가는 것도 ‘나중에!’가 입에 붙어 있었다.

모든 습관은 어떤 식이든 보상이 있기에 강화된다. 떼쓰는 아이들을 보자. 이들은 떼를 써서 부모를 이기고 원하는 것을 얻었던 학습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백해무익할 것 같은 미룸의 습관도 어떤 보상이 있을까? K씨는 마치 모범답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갖 긍정적 효과를 늘어놓았다. 무엇보다 벼락치기 효과의 쾌감을 들었다. “마감을 앞두고 밀린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 버릴 때면 뭐랄까, 해방감과 함께 내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뿐이 아니었다. 때로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도 있었고, 누군가 대신 일을 해준 적도 있었고, 어떤 경우는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어 일찍 시작한 사람들이 허탈해하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미루는 습관 때문에 상담하러 왔지만 마치 ‘미룸의 전도사’라도 되는 것처럼 미룸에 대한 찬미가 흘러 넘쳤다.

K씨처럼 미룸의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은 어떤 심리적 특징이 있을까? 우선 책임감을 느끼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미루는 습관은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렇다. ‘지금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많다. 하지만 반대로 과잉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많다. 작은 일조차 너무 큰 책임감을 느끼기에 우선순위가 뒤틀리고, 압박감에 눌려 일을 미루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들은 심리적 근시안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눈앞의 편함을 추구할 뿐, 미룸의 장기적 폐해를 잘 떠올리지 못하거나 나중에는 더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셋째로, 거절을 잘 못하고 화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상대에게 화를 잘 표현하지 못하거나 누군가 시키거나 부탁하면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상대와 연관된 일을 미루거나 대충하는 식으로 그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출하기 쉽다. 넷째, 이들은 타인의 부정적 평가에 극히 예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감과 자신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데 따른 심한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안 되느냐’ 같은 능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다. 그렇기에 차라리 일을 미루다 보니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이들에게 ‘미룸’은 능력 부족보다는 노력 부족으로 평가받음으로써 무능하지 않게 보이려 애쓰는 방어행동이다.

습관적인 미룸은 사람을 합리화의 고수로 바꾼다. 그렇지만 어떤 합리화의 고수라 해도 미룸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 이상 이렇게 미루고만 살 수 없다는 K씨와 함께 한 달 동안 훈련했던 몇 가지 방식을 소개해 드린다.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 (mt@mentaltraining.co.kr)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1) 하루를 기록하라. K씨는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기록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미루고 있는지를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다. 관찰은 변화의 시작이다. 하루의 기록이 부담스럽다면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을 적자.

(2) 스스로 선택하라. 소극성은 미룸의 어머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서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인내를 발휘한다. K씨는 매일 스스로 선택한 행동을 일지에 적음으로써 ‘이것은 나의 선택인가’라는 질문을 늘 떠올렸고 선택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3) 단 3분만 하라! K씨는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일단 3분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책상과 모니터 앞에 써서 붙여놓음으로써 마음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인간은 완성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작을 조금이라도 해놓는 것은 미룸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다.

(4) 스스로 마감하라. K씨는 지금까지 일에 시간을 맞추느라 무한정 시간을 끌어왔다. 이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정해놓고 그 안에 일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남이 준 마감시한을 데드라인이라 한다면 스스로 정한 마감시한은 라이프라인이 되어 삶을 넓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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