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봄비의 저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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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봄비의 저녁’ - 박주택(1959~)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 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에 뿌리를 두고
한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기고
배후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이건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의 노래라네. 저녁의 문들로 돌아가는 새들로 붐비는 봄비의 저녁, 지난 시간은 빗물고인 웅덩이처럼 빛난다. 상처를 잠재울 약은 이 세상엔 없지만, 저물녘 비 맡는 꽃의 강물 사이로는 아직 물을 맑힌 사랑의 정원이 떠 있다. 그대, 불멸로 남을 사랑은 없지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속의 강물에 노래의 봄비를 세우자.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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