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29.劉載興 당시 7사당장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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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中央日報가 공개한 신성모(申性模)前장관의 전황보고서는 귀중한자료임에 틀림없다.6.25전쟁 시작부터 휴전까지 지휘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한 나로서는 보고서를 보고 나니 다시금 45년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보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申장관이 거의 정확한 전황을 대통령께 보고하고 있다.
『오늘 새벽4시쯤 적이 양문리.초성리 일대의 경계진지에 일제포사격을 개시했습니다.』50년6월25일 새벽5시 요란한 전화벨소리에 잠이 깨 수화기를 들었더니 작전장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당시 의정부에 있는 7사단장을 맡고 있던 나는 적의 전면전이 시작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북한군은 약 30분에 걸쳐 우리측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은 후 신형 소련제 전차를 앞세우고 남쪽을 향해 밀고 내려왔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당시로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알고 있었으나 나중에 무용지물로 입증된 57㎜ 대전차포 6문과 2.36인치 로켓포 50여문 뿐이었다.반면 적은 주공정면(主攻正面)인우리사단에 2개사단 병력과 전차만도 1백56대, 유단포 48문등 전체 남침 화력의 3분의 1을 집중했다.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일순간에 일선 진지는 다 무너져버렸다.북한군은 25일 새벽4시 공격이후 그날 낮12시에 포천,이튿날 오후1시쯤 의정부를 점령했다.적은 의정부~창동~서울 가도를 주공격선으로 해 전차를앞세우고 일제공격을 가해왔다.사기가 극도로 떨어 진 아군은 계속 무너져 28일 서울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한강을 건넌 나는노량진에서 후퇴한 병력을 모아 한강둑에 배치해 7월4일까지 한강을 방어하다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다.7월6일 평택에서병력을 수습하고 있던중 미군 스미 스대대가 북한군과 맞섰다 대패하고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처럼 전쟁초기에는 북한군의 화력에 밀려 미군도 큰 희생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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