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IT업체 ‘스피드 경영’ 재무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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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29면

블룸버그 뉴스

“자본력이 충분하고 기술도 한 수 앞선 일본 전자업체가 빠른 의사결정 구조까지 갖춘다면 앞으로 한국 업계는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일본 소니가 지난달 26일 차세대 액정표시장치(LCD)의 유리기판(패널)을 일본 샤프와 손잡고 만들기로 했다고 밝힌 데 대해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는 “소니가 샤프와 손잡은 이면에는 한국식 ‘스피드 경영’을 학습한 효과가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니는 삼성전자와 2002년 50대50 합작법인으로 충남 탕정에 설립한 S-LCD 공장에서 LCD 패널을 공급받고 있다. 하지만 삼성이 세계 1위 TV 사업자로 올라서면서 LCD TV 사업에서 많은 흑자를 내고 있는 반면 소니는 LCD TV 사업에서 적자가 이어지자 차세대 LCD 패널의 공급처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달 초 미쓰비시전기는 휴대전화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 2007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의 휴대전화 판매 대수가 210만 대로 지난해보다 20%가량 줄어 적자가 예상되자 결단을 내렸다. 이 회사 휴대전화 사업은 2000 회계연도의 700만 대 판매를 정점으로 감소세를 보여 왔다. 2006년 해외 시장에서 철수한 데 이어 올해 내수마저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 전자업체의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있다. 불과 3, 4년 전만 해도 일본 업체들은 적자투성이 사업부를 정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느라 새로운 사업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이를 비집고 한국과 대만 전자업체들은 빠른 의사결정을 앞세워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달라진 모습이 역력하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올 들어 실적이 부진한 사업부문을 재빨리 정리하고 있다. 잘하는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게 도시바의 차세대 디지털 녹화장치 사업 중단 결정이다. 도시바는 지난달 19일 “3월 말까지 모든 HD-DVD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도시바 측은 “HD-DVD 규격 기반의 플레이어 및 리코더 장비를 세계적으로 선보였지만, 올해 초 글로벌 사업 환경이 급변하면서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도시바는 그동안 차세대 녹화장치 시장을 놓고 소니-파나소닉의 ‘블루레이’와 접전을 벌여 왔다. 하지만 올 1월 미국의 세계 1위 홈비디오 업체 워너 브러더스가 차세대 저장장치로 블루레이를 쓰기로 하자 HD-DVD 사업에서 재빨리 손을 뗀 것이다. 판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즉시 과감히 사업 철수 결정을 내렸다. 도시바는 HD-DVD 사업 철수로 생기는 여유자금을 낸드플래시 등 반도체 사업에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 우선 제휴업체 샌디스크와 추가로 8000억 엔(약 8조원)을 투자해 낸드플래시 공장을 2곳 증설한다.

파이어니어는 올해 안에 PDP 패널의 생산을 중단할 방침이다. 대신 마쓰시타전기로부터 PDP 패널을 조달해 TV를 만들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일본의 PDP 패널업체는 마쓰시타와 히타치로 정리되게 됐다. 파이어니어는 여름께 샤프로부터 LCD 패널을 납품받아 LCD TV를 만들기로 해 PDP TV에선 마쓰시타와, LCD TV에선 샤프와 제휴하게 된다.

산요는 올해 초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교세라에 500억 엔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산요는 매각 대금을 새로운 주력 사업인 태양전지와 2차전지 사업에 투입할 계획이다.

일본 전자업체들이 이처럼 수익성 낮은 사업을 정리하고 신규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예상이다. 조두섭(경영학) 요코하마국립대 교수는 “일본 전자업체들의 한국 배우기는 2002년 본격화됐다”며 “오너가 경영하는 한국 전자업체의 스피디한 의사결정 과정을 여러 각도에서 벤치마킹한 효과가 최근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 전자업체는 요즘 급격한 엔고(円高)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나카무라 구니오(中村邦夫) 마쓰시타전기 회장은 지난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전자업체의 경쟁력은 10년 불황을 겪는 동안 담금질됐다”며 “달러당 환율이 90엔 정도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업체들이 불황으로 임금을 올리지 않아 가격 경쟁력을 갖춘 데다 일본 특유의 ‘물건 잘 만들기(모노 쓰쿠리)’ 정신으로 재무장함으로써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서 과거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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