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11> 『천 개의 고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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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13면

요즘 세계 철학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을 펼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함께 묶이지만 구축과 종합의 철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와 상극이다. 데리다는 세세하게 따지고 극적으로 해체하는 정교함이 찬탄을 자아내지만 들뢰즈는 과감한 연결과 장대한 통합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지식으로 쌓아 올린 웅장한 ‘철학의 성채’

인간의 사고는 분석과 종합이라는 두 가지 길을 따른다. 그리스 어원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원래 얽혀 있는 실(lysis)을 푼다(ana)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종합한다는 것은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물을 만든다는 것을 뜻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어 나가거나 이 실 저 실 모아 양탄자를 짜는 것과 같다. 분석하는 철학자, 복잡한 매듭을 풀어가는 철학자는 법률가와 가까워진다. 양탄자를 짜는 철학자, 종합하는 철학자는 경영자와 닮게 된다.

왜 그런가? 경영자는 새로운 가치와 부(富)의 창출에 골몰한다. 율사(律士)는 소유의 조건이나 정당성을 따진다. 분석하는 철학은 이미 획득된 지식의 전제나 근거를 문제 삼고 주어진 여건에 대한 형식적 명료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율사와 같다. 반면 종합하는 철학자는 당대의 지식을 재료로 새로운 등급의 지식과 통찰을 구한다는 점에서 최고경영자(CEO)와 다르지 않다. 분석하는 철학은 기존의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므로 인식론이라 불린다. 종합하는 철학은 과학이 도달하지 못한 사물의 심층을 겨냥하므로 존재론이라 불린다. 들뢰즈는 20세기 후반기의 존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 천 개의 고원』 Mille Plateaux 질 들뢰즈ㆍ펠릭스 가타리, 1980, 새물결(2001)

존재론에는 자연철학적인 존재론과 정신철학적인 존재론이 있다. 자연철학은 최하위 물질에서 최상위 정신적 사건에 이르는 모든 현상을 동일한 원리에 의거해 설명한다. 반면 정신철학은 정신과 자연이 서로 다른 원리에 따른다고 보고, 언어나 예술 등에 관련된 인간의 정신적 경험을 중시한다. 하이데거가 정신철학 전통의 존재론을 펼친 철학자라면, 들뢰즈는 자연철학 전통의 존재론을 발전시켰다.

전통적인 자연철학에는 약점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우주의 역사 속으로 함몰된다. 언어적 현상이나 실존적 경험은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고 생물학적 사건의 일부로 편입된다.

들뢰즈는 이런 한계를 극복했다. 자연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첨단의 윤리학ㆍ언어철학ㆍ미학 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런 관점에서 꼽을 수 있는 들뢰즈의 대표작이 『천 개의 고원』이다.

이 작품은 가타리와 함께 쓴 공동 저작이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인 가타리와 만나 혼자였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 현대 학문의 지도 위에 만 개의 고지를 장악한 것이다. 이 저작은 존재론에서 예술론에 이르는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단 한 권 속에서 개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철학사상 이 작품과 견줄 수 있는 것은 헤겔의 『정신현상학』밖에 없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천 개의 고원’이란 철학이 연출되는 천 개의 극장, 천 개의 무대를 말한다.

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개념ㆍ인물ㆍ이론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삼국지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읽을 때처럼 현기증이 일어난다. 특히 첨단의 과학과 예술, 과격한 이념과 전복적인 이론이 망라되었다. 이 두꺼운 책은 과거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온갖 불온한 사상의 비빔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