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깬 DJ의 첫 마디 “지역구민 무시한 공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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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 공천에 침묵해 온 김대중(DJ·얼굴) 전 대통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신의 최측근인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차남 김홍업 의원이 금고형 이상의 부정 비리 전력자 배제 기준에 걸려 공천에서 탈락한 불만을 21일 최경환 비서관을 통해 터트렸다.

‘박지원 비서실장, 김홍업 의원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 최경환 비서관 논평’이란 긴 제목이었다.

DJ는 이 논평에서 “(민주)당은 비리에 관련된 사람을 배제할 책임도 있지만 억울하게 조작된 일로 희생된 사람의 한을 풀어 줄 책임도 있다”며 “박 전 실장과 김홍업 의원은 공천 신청 전에 미리 당 지도부에게 얘기했고, 당이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공천을 신청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의 경우 같은 문제를 두고 지난번엔 괜찮다고 공천을 주고, 이번엔 불가하다고 공천을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며 “지난 보궐선거에서 더블스코어로 압승해 심판을 내린 지역구민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선 이 논평이 사실상 DJ가 박 전 실장과 김 의원의 무소속 출마를 지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박 전 실장은 이미 전날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김 의원도 곧 무소속 출마를 결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DJ의 발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박경철 공천심사위 홍보간사는 “어른의 말에 즉답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반응을 피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50년 정통 야당의 맥을 살려 달라’고 했던 DJ가 측근들이 무소속으로 나가겠다면 말려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무소속 출마를 두둔하고 나선 건 실망스럽다”고 꼬집었다.

한나라당 심재철 원내수석부대표는 “대통령을 했다는 분이 자기 식구 챙기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라서 보기 안 좋다. 국가 원로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 달라”고 비판했다.

◇호남서도 무소속 연대 움직임=공교롭게도 DJ의 발언을 전후해 호남에선 무소속 벨트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김홍업(무안-신안) 의원 측 관계자는 이날 “김 의원이 무소속으로 나설 경우 목포(박지원), 고흥-보성(신중식), 광주 광산(송병태) 등과 자연스럽게 연대해 무소속 벨트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신중식 의원도 “무소속 후보들끼리 ‘민주평화연대’를 결성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에선 공천 탈락자 7명이 ‘원 민주당 무소속 후보자 연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구 민주당계가 전북에선 한 명도 공천을 못 받았다. 편파 공천이 심판을 받도록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DJ의 발언은 호남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명분을 제공해 줄 전망이다. 당 관계자는 “현재 호남의 서남부 지역에서 무소속 벨트가 형성될 조짐을 보이는데 이곳에서 당 후보들이 고전하면 전체 총선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무소속 출마가 결국 미풍에 불과할 것이란 시각도 만만찮다. 광주의 한 후보는 “호남 지역에 ‘거여 견제론’의 정서가 강한 만큼 당의 프리미엄을 얻지 못한 후보가 선출되긴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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