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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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딱하기는 길례 자신도 매한가지였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에서 마냥 헤매는 꼴이다.아예 출구가 없는 미로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을 단체관광으로 다녀오고 「역사대학」 주부강좌를 신청했을 때만 해도 치졸한대로 희망같은 것이 있었다.출구는 반드시 찾아지리라는 희망이었다.
길례의 출구란 도약을 의미했다.궂은 일상에서 벗어나 「정길례」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뭔가를 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결혼과 더불어 이름을 잃어버린다.아무개 부인,아무개 어머니일뿐 내 이름은 없다.
내 이름을 찾고 싶었다.아버지가 지어준 「정길례」라는 그 얼얼한 이름을….
희망의 양초에 불 켜준 것이 아리영 아버지다.그는 여자를 키워내는 조련사(調練師)였다.
육신의 환희에 눈뜨게 해주고 정신의 고양(高揚)을 북돋워주는상양하고 믿음직한 조련사.
음악은 영혼을 부패시키지 않는 유일한 쾌락이라 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이었던가.
조련사는 육신의 쾌락을 누리는 기법과 더불어 영혼의 쾌락을 누리는 음악감상법도 함께 일러주었다.
길례의 일상은 이미 궂은 수렁이 아니라 연당(蓮塘)이었다.선연하게 피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는 그 꿈도 한낱 꿈으로 끝났다.촛불이 꺼진 것이다.
길례는 일어서서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강변 아파트의 10층 집이다.
연푸른 강물이 아침 햇살에 부서지며 도도히 흘러간다.청둥오리떼가 흔들리며 떠내려가는 것이 깨알처럼 보인다.
강 너머 자동차의 물결.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다.길례만 빼고 모든 것이 가고 있다.
견딜 수 없는 탈락감.상실감이 길례를 덮친다.어디로인지 떠나가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어머니도 이래서 가출한 것은 아닐까? 아홉살때 집을 나간 어머니 생각이 문득 났다.
어머니에겐 「신」이 내렸다 한다.그래서 무당이 되어 집을 나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외동딸마저 내내 찾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춰버린 까닭은무엇인가.
어머니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누구와 함께 간 것일까.지금도 살아 있는 것일까.아니면 어디서 어떻게 죽은 것일까.
『꼭 찾아올 게다.』 어린 길례가 어머니를 찾아 보챌 때마다아버지는 이 한마디만 되풀이했었다.길례를 달래기 위해 하는 소리만은 아니었다.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하는 말투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오지 않았다.
청둥오리처럼 자맥질하는 길례의 마음을 휘어잡듯 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아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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