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미국 뒤덮는 악몽 …‘일본식 장기불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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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 기시감(旣視感)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전에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을 가리킨다.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난해한 용어가 요즘 미국의 금융 불안을 가리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의 와타나베 요시미(渡邊喜美) 금융담당상이 이 말을 처음 썼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의 공개 토론에서 세계 금융 불안과 관련해서다. 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일본인에겐 ‘데자뷔’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화로 촉발된 미국의 금융 불안이 거품이 꺼진 직후의 일본과 흡사하다는 표현이다. 구본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국의 금융 당국이 미적거리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말한 듯하다”고 해석했다.

와타나베의 말대로 최근 미국의 금융 불안과 신용경색은 1990년대 말 일본에서 나타난 것과 판에 박은 모습이다. 일본은 90년 초 자산 버블이 꺼지면서 부동산과 주식 값이 폭락했다. 특히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던 은행들이 일제히 부실의 수렁 속에 빠졌다. 부실 채권에 묶인 은행들이 기업에 제대로 돈을 빌려주지 못하자 이번엔 멀쩡하던 기업들도 비실거렸다. 금융 불안이 실물경제에 타격을 준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값이 하락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하고, 여기에 투자한 금융사들이 거액의 손실을 떠안았다.

여기까지는 어느 나라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일본은 제때 대처하지 못해 매를 벌었다. 일본 정부는 버블이 붕괴된 뒤에도 몇 년 참으면 살아날 것이라고 판단해 2~3년 정도를 허비했다. 그러나 불황이 깊어진 뒤에는 회복도 어려워졌다. 90년 대 이후 일본 정부는 10차례에 걸쳐 무려 124조 엔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썼지만 효과를 못 봤다. 90년 대 후반에는 공적자금 투입을 주저하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기회를 놓쳤다. 구본관 연구원은 “부실 채권 처리를 오래 끄는 바람에 불황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사후 대책으로 꺼내 든 저금리 정책도 닮은꼴이었다. 일본은 경기 회복을 위해 유례 없는 ‘제로금리’ 정책을 쓰면서 시중에 돈을 퍼부었다. 미국도 올 들어 금리를 계속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아무리 돈을 풀어도 은행에 고여 있을 뿐 기업에 수혈되지 못했다. 한 번 신용경색이 심해지면 금리정책은 약발이 듣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은 “금융 불안이 일어났을 때 금리를 내리는 것은 당장의 고통을 면하기 위해 독약을 마시는 셈”이라며 “사태의 원인과 대응 면에서 일본과 미국이 똑같다”고 말했다.

금융 불안이 일어났을 때의 저금리 정책은 기업보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지원의 성격이 강하다. 전문가들은 이를 ‘보이지 않는 보조금’이라고도 한다. 김광수 금융위원회 국장은 “버냉키가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것 같다. 어차피 상당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조금이라도 덜 넣기 위해 미리 금융회사에 여유를 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일본은 부실 금융사 처리를 질질 끌었지만 미국은 베어스턴스가 부실화하자 즉각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남은 관전 포인트는 미국 정부가 향후 부실 금융사에 직접 공적자금을 투입할 것이냐다. 지금까지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80년대 저축대부조합(S&L)이 부실화했을 때 공적자금을 투입한 경험이 있다.

한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최근 미국 정부의 대응과 관련해 “일본의 괴로웠던 교훈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윤호·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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