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싶다 세월이 머문 산모롱이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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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롱이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설핏 스쳐보아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언뜻 눈에 띄는 이발소 회전간판이 소박하다. ‘도심 속 시골’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드문드문 보이는 갤러리와 카페의 모던함이 파격인 듯 조화롭다. 어쩐지 고즈넉한 부암동(付岩洞)의 봄 풍경. 북악 자락의 맑은 공기는 산책코스로도 그만이다. ▶관계기사 2면

동네 이름, 부침바위(부암: 付岩)에서 유래
청와대 뒷길로 세검정을 향해 굽이길을 달리다 언덕을 지나면 은근히 숨어있는 마을을 만난다. 면적 2.27㎢에 인구 1만1794명, 4501세대가 살아가는 부암동이다. 반대편 자하문 터널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다. 동네 이름은 부침바위(부암: 付岩)에서 유래됐다. 세검정 길가 바위에 자신의 나이만큼 돌을 문지르고 손을 떼면 바위에 돌이 붙어 아들을 얻게 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또 창의문을 통해 전장에 나간 남편의 무사귀환만을 바라는 뜻에서 아낙네들이 돌을 붙였다는 전설도 내려 온다.

 
고궁·박물관에서 느끼는 호젓함
 최근 1~2년 사이 이 부침바위골에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촬영지로 입소문을 타고부터다.
 16년간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오보에 연주를 담당하다 2003년 3월, 아내와 함께 이곳에 둥지를 튼 아트 포 라이프 성필관(53)관장은 “하루에 열명도 잘 안 다니던 거리에 차들이 줄을 잇고 주차난까지 겪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부암동 명소로 꼽히는 클럽 에스프레소 마은석(41)대표 역시 “7년 전만해도 하루 매출이 5만~7만원에 불과했다”며 한적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지인의 소개로 이곳을 처음 찾았다는 오승연(30·회사원)씨는 “고궁이나 박물관에서 느낄 법한 호젓함이 인상적”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비주얼 디자이너 이승희(38)씨는 “부암동은 새마을운동과 88올림픽을 겪은 세대의 유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며 “8년 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까지도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해 놀랐다”고 고백했다. 15년 전, 4대째 살아오던 주택을 개조해 손만두집을 연 박혜경(53)대표는 “다른 곳에 비해 부암동은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 같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의 흐름이 부암동만 살짝 비껴간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많은 문화유산 숨쉬고 맹꽁이·도룡뇽 서식
 주민들은 이곳에 둥지를 튼 이유로 주저없이 ‘환경’을 꼽았다. 인왕산(338m) 동쪽 기슭에 자리하며 북악산(342m)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주민들은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에는 백사실 계곡에서 맹꽁이와 도롱뇽을 비롯한 희귀 동식물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손인섭(35·주부)씨는 공기 좋고 쾌적한 환경을 찾아 2년전 한남동에서 이사 왔다. 그는 “아이 셋을 키우는데, 계절이 바뀌어도 감기 한 번 안 걸린다”며 “예방접종 외에는 병원 갈 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부암동은 문화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안평대군·흥선대원군의 별장인 무계정사·석파정이 살아 숨쉰다. 서울 4소문(小門) 중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창의문과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도 남아 있다. 또 유명한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 좋은 날’을 남긴 소설가 현진건의 집터도 만날 수 있다. 클럽 에스프레소의 마 대표는 “동네 주민의 절반이 김 박사 아니면 김 화백이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예술가·문인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자연과 예술·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부암동. 길손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북적거림’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늘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프리미엄 김혜영 기자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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