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규제 철폐보다 앞서야 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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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앙일보 3월 14일자에 ‘정부가 학원 시간까지 결정할 것인가’란 사설이 실렸다. 최근 불거진 학원 심야교습 논란을 두고 비정상적인 사교육 열풍은 분명 문제지만 그렇다고 교육당국이 규제로 문제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워낙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인지라 논설위원실에서 그야말로 난상토론이 벌어졌었다. 10여 명 논설위원들의 팽팽한 줄다리기 논쟁 끝에 결국 “사교육 규제보다 공교육 활성화가 먼저”라는 중앙일보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사설이 나갔다.

나는 그 사설의 논조에 공감하지만 굳이 한쪽 편에 서라고 한다면 그날 회의에서 다른 생각을 말했던 소수의견의 입장에 서겠다. 물론 나 역시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게 규제라는 신념을 가졌다. 그래도 어쩐지 소수의견 쪽으로 몸이 쏠리는 것은 학원 24시간 영업을 허용한 조례 개정안을 만든 서울시의회 교육문화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저의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인즉슨 이렇다. 학원을 24시간 편의점처럼 만들어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아무 때나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다. 강의실이 없어 돌아가는 학생들을 위해 지하 골방도 수업 공간으로 쓸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다. 거기에 학원 경기를 부양해 막 출범한 새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일조하는 부수효과도 염두에 뒀을지 모를 일이다.

의원님들의 마음 씀씀이가 눈물겨워야 할 텐데 영 믿음이 안 가는 게 이상하다. “성인이 과로해서 죽었다는 말은 있어도 학생이 공부하다 피곤해서 죽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는 시의회 교육문화위원장의 말이 기막히긴 하지만 넘어갈 수 있겠다. 나 또한 죽기 직전까지 공부한 적 없었고, 공부하다 죽은 사람도 못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학원 영업시간을 밤 10시에서 11시로 한 시간 늘렸던 것을 아예 24시간 허용키로 인심을 쓰고 지하 공간을 강의실로 허용키로 한 수정안에서는 어쩐지 냄새가 난다. 그것이 학원들의 숙원사업이었다는 점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밤 10시라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 없음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업시간을 현실화하는 것보다 급한 건 없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코흘리개 유치원생이 별 보며 보습학원에 가고, 학원 버스와 학부모 차량들의 겹치기 주차에 때아닌 교통 혼잡이 빚어지는 자정 무렵 학원가 풍경이 우리 현실이다. 누구 아들은 국·영·수에 사회까지 과외 받으니 우리 아들은 국·영·수·사에 과학까지 따로 가르쳐야 한다는 ‘군비경쟁’형 사교육 열풍이, 그런 학업 부담을 못 견뎌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해답을 찾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 모습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런 광란이 싫어 외국으로 떠나는 기러기들이 줄을 잇고, 온갖 과외로 명문대 가고서도 저 혼자 힘으로는 전공서적 하나 고르지 못하는 반쪽 대학생들이 넘치는 현실 역시 들여다봐야 할 우리의 거울이다.

이를 모두 사교육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다. 사교육은 무너진 공교육의 대체재로 발전한 게 사실이니 그렇다. 하지만 연간 20조원 규모의 공룡으로 성장한 사교육이 스스로 권력이 돼 공교육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시의원들의 말마따나 학원들이 심야영업 금지 같은 법령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은 지 오래일뿐더러 이제는 아예 국가 백년대계를 쥐락펴락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원 수업시간에 맞춰 학교의 자율학습시간을 바꾸는가 하면 각종 시험문제를 학원에서 먼저 안다.

시의원들이 그런 학원들의 주제넘은 일탈을 감시하고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는 게 우선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지 못하고 학원들과 장단 맞춰 춤추고 있으니 지방의회 무용론이 나오는 거다. 저만 없어지면 그만이지만 합리적인 규제 철폐 목소리까지 덩달아 힘 못 쓰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늘 권력집단의 규제 불가피론이 승리하고 전봇대가 사방천지에 버티고 서게 되는 거다. 그래서 국민이 불편하고 불행해지는 거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